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3 - 일제 강점기 시대의 여성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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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3 - 일제 강점기 시대의 여성인권

by 개인주의자 2024. 6. 22.

제가 본격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기 전에 그 당시 여성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이유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판단할 때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때문입니다. 저는 그 당시 여성인권상황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자는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에게 그 당시 여성인권의 상황에 대해 옳고 그름을 묻는다면 당연히 "옳지않다"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런 대답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해 이해하고 싶으신 분들은 그 당시 여성에 대한 인권상황이 어떠했는지 부터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시리즈

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1 - 시리즈를 시작하며

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2 -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설의 시작(요시다 세이지)

 

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4 - 일본군 위안소의 창설과 일본 정부의 관여

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5 - 위안부 할머니 증언의 개요

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6 - 할머니들은 어떻게 위안부가 되었을까? 1

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7 - 할머니들은 어떻게 위안부가 되었을까? 2

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8 - 할머니들이 증언한 강제연행은 과연 사실일까?

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9 - 소녀상처럼 위안부 할머니들은 진짜 소녀 때 위안부로 갔을까?

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10 - 일본군 위안부는 정말 성노예였을까?

 

일본군 위안부 진실은 무엇인가? 11 - 시리즈를 마치며(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조선시대때 부터 이어온 여성인권 실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조선시대때는 주자성리학이라는 학문과 사상이 전 사회를 지배하면서 여성의 인권이 정말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1. 이름이 없던 여성들

사실 조선시대때는 신분제가 매우 완고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양반, 중인, 양민, 천민의 신분이 완고하게 있었는데요. 천민의 경우 여성이고 남성이고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성의 경우는 천민이 아니더라도 이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하는 사극을 보신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사극에서 여성이라면 당시에 가장 높은 신분으로 볼 수있는 왕의 부인(중전) 또는 왕의 할머니(대비)일지라도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왕후 ○○조씨, △△대비 ○○김씨 뭐 이랬습니다.

 

이 전통이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이 당시에도 여성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 증거가 이화여대 총장이었던 김활란 박사의 경우입니다. 활란이라는 이름이 이분의 본명이 아니라 이름이 없다보니 서양 선교사들이 헬렌이라는 서양이름을 지어주었고 그것을 한자로 바꾸다보니 활란이 된 것입니다.

 

2. 남존여비가 심했던 사회

조선시대때는 남존여비가 상당히 심했습니다. 천민을 노비라고 부르는데요. 여기서 노는 남자, 비는 여자를 뜻합니다. 그렇게나 천대받던 노비들간에도 남녀차별이 엄청났습니다. 남자 천민인 노가 여자 천민인 비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게 여성을 천대하다보니 가정안에서도 여성의 지위는 바닥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한 가정에서 자녀를 낳아도 아들과 딸을 차별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차별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 당시 집은 매우 가난한데 자녀들이 많다보니 아이들을 키울 능력이 안되었고 부모들은 자녀를 인신매매로 팔거나 아프면 버렸는데 그 대상이 대개 딸이었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이화여대 입니다. 이화여대는 1886년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설립한 이화학당이 그 모태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전부 버려진 여자아이들이었습니다. 당시 부모들이 어린 딸이 아프니까 안그래도 가난한 집에서 밥술을 덜고자 치료는 하지않고 죽든말든 밖에 내버렸고 이 아이들을 외국인 선교사들이 데려다가 치료해주고 공부를 가르친 곳이 바로 이화학당이었습니다.

 

3. 남녀차별은 극히 최근까지도 있었다.

남녀차별이 일제강점기에만 있었던게 아닙니다. 저희 부모님 세대는 1950년대 생입니다. 이 세대는 베이비 붐 세대로서 당시 한 가정 당 아이들이 5~6명씩 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도 우리나라는 매우 못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교육열도 높아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했는데 가난하다보니 선택과 집중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아이들 중에 선택과 집중을 받은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 이었을까요? 만약 아들이고 딸이고 공부를 잘하고 또 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를 선택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것과 관계없이 아들이었습니다. 대신에 딸들은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차별이 생겼을까요?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성차별(남녀차별)은 왜 있어왔는가?를 참조하시고 빨간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이화학당

 

 

일본군 위안부로 간 할머니들의 사정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위안부가 된 사정에 대해 우리는 깊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앞으로 제가 위안부에 대한 글을 더 쓰면서 할머니들이 남긴 증언을 바탕으로 글을 쓸 것입니다. 그분들 중 증언상 자신이 강제로 끌려갔다고 증언한 분도 계시지만 반대로 강제와 전혀 관계없이 위안부가 되었다고 증언하셨던 분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든이유가 그 당시 여성인권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일본정부는 조선반도에서 여성들을 강제연행하여 위안부로 만들었다는 주장에 대해 일관되게 부인해오면서 우리는 모집했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기위해 왔다고 말해왔었습니다. 이것이 얼핏 듣기에는 모욕으로 들릴 수 있지만 당시 여성의 인권실태를 알고 보면 이해가 됩니다.

 

물론 위안부가 되기까지 개인적인 비극은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제연행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멀쩡한 여성이 위안부가 되고 싶겠습니까? 앞으로 할머니들의 증언을 보면서 이 비극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머니들의 엇갈린 증언

우리가 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알고 있는 할머니들 중에서 그 증언이 엇갈린 분들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이 스스로 간 것으로 증언했다가 나중에 강제연행으로 말을 바꾼 경우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것입니다. 

 

문제는 왜 이분들이 자신의 증언을 뒤집었는가? 입니다. 어떤 분은 할머니들애게 그 기억이 너무나 공포스러운 악몽과도 같기 때문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쨌든간에 가해자라고 지목된 일본정부에 항의하기 전에 그 할머니들의 진술이 왜 바꼈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확립해야 하고 둘 중에 무엇이 진실인지 부터 확립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후에 가해자에게 따져야 겠지요.

 

지금과 다른 그 시대의 여성인권의 실태를 명심하라

이 부분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역사를 볼 때 현재의 관점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면 오류가 생깁니다. 매우 비참한 여성인권의 현실이었지만 이 현실을 제대로 알 때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진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도 여성인권에 대해서는 우리와 별반다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후술하겠지만 일본군 위안부는 조선인만 있었던게 아니라 일본인들도 많았습니다. 이 일본여성들도 대부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여성들이었다는게 조선인과 같습니다.

 

김활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