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포스팅은 전두환 정부의 공들 중에 경제분야에 대한 마지막 글로써 3저 호황과 외채의 악순환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전두환 정부 말기쯤 되면서 3저 호황이 왔다는 사실은 아마 많은 분들이 아실겁니다. 그러나 3저 호황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 정부의 경제정책과 어떻게 맞물렸는지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분은 3저 시대가 왔는데 호황은 당연한거 아니냐?라고 말하면서 아무나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분들께 제가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노무현 정부때도 세계는 엄청난 호황이었는데 그때는 왜 경제가 나빴습니까?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시리즈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1 - 전두환은 5.18과 어떤 관계인가?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2 - 전두환은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을까?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3 - 경제분야 1 : 전두환 정부 초기 경제상황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4 - 경제분야 2 : 인플레이션을 잡아라!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5 - 경제분야 3 : 금융민영화와 수입자유화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7 - 산업정책 1 : 한국 반도체 산업의 시작과 발전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8 - 산업정책 2 : 통신혁명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9 - 국민 통제 해제 : 야간통행금지 해제, 두발 자유화,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 해외 유학 자유화 등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10 - 88 서울 올림픽의 의미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11 - 시리즈를 마치며(왜 전두환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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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저 호황, 무엇이 3저인가?
전두환 정부 말기인 1986년 세계경제는 이른바 3저 시대로 진입하여 노태우 정부 초기인 1989년까지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3저 일까요? 바로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를 말합니다. 그럼 세 요소가 어떻게 오게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저유가
1970년대, 두번의 오일쇼크가 있었습니다. 바로 1, 2차 오일쇼크를 말합니다. 1차 때는 중동과 이스라엘 전쟁때문에 이스라엘을 편들고 있는 서방국가들에게 소위 엿먹이기 위해 중동 산유국들이 하나로 뭉쳐 감산을 하면서 유가가 급격히 상승한 것입니다.
2차는 1979년 이란의 회교도 혁명때문에 대 산유국이었던 이란에서 대규모 감산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저유가는 바로 2차 오일쇼크의 결과로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유가가 급등하자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납니다. 다른 중동 산유국들이 돈을 더 벌고 싶은 마음에 증산을 하는 경우와 저유가에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던 유전이 고유가로 수지타산이 맞게되면서 새롭게 생산을 시작하는 경우입니다.
대표적인 유전이 바로 영국의 북해유전입니다. 해양의 유전의 경우 해저까지 뚫고들어가 석유를 뽑아내야 하므로 육지에있는 유전보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해양에서 운반해야 하는 등 여러부대시설이 더 많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저유가 상황에서 해저유전에서의 생산은 오히려 생산비용도 못버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유가로 손익분기점이 넘는 순간, 생산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로인해 세계적으로 석유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저유가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2) 저금리
금리는 이자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금리일까요? 바로 미국의 연준의 금리를 말합니다. 미 연준이 금리를 낮게 책정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이때 연준이 금리를 낮췄을까요? 1979년 2차 오일쇼크로 인해 유가가 급등하게되면 제품을 생산하는데 있어 중요한 원자재중 하나 석유의 가격상승으로 인해 제품 생산비용이 높아지게 됩니다.
이 높아진 생산비용이 실제 판매가격에 적용되면서 소비자물가가 상승하게 됩니다. 이로인해 1979년 당시 미국에서는 11%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소비가 줄어들게 되면서 불황이 오게되는데 이를 스테그플레이션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연준의장이었던 폴 볼커는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이윽고 연준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10월 6일 연 11%였던 연준금리를 4%인상한 15%로 올렸고 다음해 20%까지 올렸습니다. 이로인해 기업이 빌린 단기외채가 많았던 우리나라에도 압박이 심해졌었습니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부 말기인 80년대 중반인 1986년에 2차 오일쇼크의 여파가 잦아들면서 연준은 다시 경기부양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연준은 10%이하로 금리를 내렸습니다.
3) 저달러
이 저달러라는 것은 달러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모든 통화에 대한 가치가 떨어진 것이 아니고 독일 마르크화와 일본 엔화대비 가치가 떨어진 것입니다. 독일과 일본에게 엄청난 무역적자를 보고있던 미국은 1985년 두 나라와의 플라자 합의를 통해 화폐가치를 조정합니다.
일본의 엔화의 경우 1달러 당 250엔에서 150엔으로 조정하면서 달러의 가치를 확 내려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20000엔 짜리 소니 워크맨의 예를 들겠습니다.
20000(엔) / 250(엔) = 80달러, 20000 / 150(엔) = 133달러
만약 1달러당 250엔에서 20000엔 짜리 소니 워크맨은 80달러입니다. 그러나 1달러당 150엔이 되어버리면 소니 워크맨은 133달러가 됩니다. 한마디로 해당 제품의 디자인도 바뀐 것이 없고, 나사하나 더 들어가지도 않았음에도 단지 환율만으로 제품가격이 약 70%가량 상승되었습니다.
이로인해 미국시장을 비롯한 세계시장에서 일본제품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으며 이 빈자리를 한국제품이 채운 것입니다.
3저 시대는 어떻게 국내 경제정책과 만났는가?
3저는 세계 경제환경이 바뀐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전두환 정부의 공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현재로 예를들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세계적 상황이 우리 정부의 공이나 과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면서 방산수출이 대박을 치게 된 것은 그동안 우리 정부의 정책의 결과와 세계정세의 하모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3저라는 세계경제의 현상이 전두환 정부가 초기부터 해왔던 정책과 어떻게 하모니를 일으키며 우리나라에 호황이 왔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저유가와 경제정책
먼저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중화학공업이 아니더라도 석유는 여러 제품생산과 관련해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유가가 떨어지면 당연히 제품 생산비용이 낮아지게 되어있습니다.
동시에 박정희 정부 때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와 정부주도 계획경제의 한계로 인해 심각한 비효율을 겪고있던 중화학 공업을 전두환 정부들어 전면 개편하므로서 효율이 극대화 되었고 수입자유화를 통해 세계기업들과 경쟁하면서 제품의 품질이 높아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유가를 만나게 되면서 우리의 중화학 공업은 날개를 달게되었고 일본제품을 대체하면서 역대 최대의 호황이 왔습니다.
2) 저금리와 경제정책
1986년 당시 미국 연준이 금리를 10%이하로 내린 이유가 바로 경기부양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달러는 세계 기축통화로서 미국의 금리 정책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미 연준의 저금리 정책으로 미국을 포함한 세계전체로 달러가 많이 풀리면서 오일쇼크로 인한 무역의 위축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나라도 외채금리로 인한 압박이 사라졌습니다. 이미 전두환 정부는 수입자유화로 인해 우리산업제품의 품질을 급격히 높혀놓았고 동시에 기업들이 엄청난 구조조정을 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정책의 결과들이 세계경제의 기조와 맞물려 급격한 호황을 불러온 것입니다.
3) 저달러와 경제정책
플라자 합의로 인해 일본의 엔화와 독일을 마르크와 대비 달러의 가치가 내려갔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설명드렸듯이 일본제품의 가격이 급등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제품의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비싸진 일본제품의 대체재로 한국제품이 떠올랐고 일본제품의 빈 자리를 한국제품이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만약 일본제품이 아무리 비싸졌다고 한들, 한국제품이 일본제품을 대체할 수 없을정도로 품질이 너무 조악했다면 가능했을까요? 위에서 말씀드렸듯 수입자유화로 인해 국내로 수입제품이 쏟아져 들어오자 국내기업들은 뼈를깍는 노력을 통해 품질을 향상시켰습니다. 그랬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3저 호황이 결과
1) 외채의 급격한 감소
3저 호황은 우리나라에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라는 엄청난 선물을 줬습니다. 이로 인해 외채를 엄청나게 줄였습니다. 이 외채를 줄이는데는 전두환 정부 초기 심각했던 인플레이션을 잡은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산림녹화에 성공하려면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벌목하는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석탄을 캐서 연탄을 만들어 공급하므로서 그 원인을 제거했듯이 외채를 줄이려면 기업들이 외채를 쓸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당시 우리 기업들이 외채를 끌어다 쓴 이유가 바로 당시 심각했던 인플레이션이었습니다. 은행금리는 7%인데 물가상승률이 30%라면 가만히 앉아있어도 매년 23%씩 손해보는데 누가 저축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당시에는 사람들이 저축을 전혀 하지않고 사재기를 했던 시대였습니다.
전두환 정부가 물가상승률을 2%정도로 낮추는 동안 은행이자는 여전이 7%였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저축하게 되었고 은행에 돈이 많아지자 기업들은 국내 은행에서 대출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됨과 동시에 3저 호황이 오자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면서 많은 외채를 갚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2) 실업률, GDP 증가율, 1인당 GDP
당시 실업률은 급격히 줄어 완전고용에 가까웠고 GDP 증가율은 10%가 넘었으며, 1인당 GDP는 급격히 올라갔습니다. 이는 더이상 말이 필요없이 그래프로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