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2까지 전두환 정부의 수많은 공을 가리는 세 가지를 모두 다뤘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시리즈의 의도에 맞게 전두환 정부의 공을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전두환 정부가 세운 한국경제에 대한 공을 알기 위해서는 전두환 정부가 들어설 당시의 한국경제 상황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시리즈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1 - 전두환은 5.18과 어떤 관계인가?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2 - 전두환은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을까?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4 - 경제분야 2 : 인플레이션을 잡아라!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5 - 경제분야 3 : 금융민영화와 수입자유화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6 - 경제분야 4 : 3저호황과 외채의 악순환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7 - 산업정책 1 : 한국 반도체 산업의 시작과 발전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8 - 산업정책 2 : 통신혁명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9 - 국민 통제 해제 : 야간통행금지 해제, 두발 자유화,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 해외 유학 자유화 등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10 - 88 서울 올림픽의 의미
전두환 정부는 어떤 정부였을까? 11 - 시리즈를 마치며(왜 전두환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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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의 중화학 공업
박정희 정부가 5.16쿠데타로 1961년 집권한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중화학 공업에 박차를 가합니다. 처음에는 중화학공업에 투자할 자금이 부족해서 광부와 간호사를 서독으로 보내기도 하고 일본과 수교하면서 대일청구권 자금도 받아냈고 군인들을 베트남으로 파병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벌어들인 Seed Money로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를 뚫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국가주도로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갔습니다. 이때 지금은 민간기업이 되어있는 중화학 공업관련 국영기업들도 많이 세웠고 부족한 자본을 통해 만들어진 민간기업인 재벌도 등장했으며 특히 각 마을단위에서는 새마을 운동이 정부지원과 주도로 실행되면서 나라의 모습이 급속히 바꼈습니다.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정책, 위기를 만나다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하는 도중 우리나라는 두번의 오일쇼크를 맞았습니다. 당시 우리의 국가 주도 산업이 중화학 공업이었기 때문에 두번의 오일쇼크는 우리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화학 공업 중 화학공업은 석유가 가장 기본적인 원료였기 때문입니다.
1차 오일쇼크
1차 오일쇼크는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전쟁으로 인해 아랍국가들이 석유를 무기화 시키며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우 슬기롭게 대처해서 1차 오일쇼크는 상당히 무난하게 넘겼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때 중동 건설붐이 일어난 것입니다.
석유값이 비싸지자 중동으로 달러가 몰렸고 이 막대한 달러로 인프라 시설을 짓고자 했지만 선진국 건설사들이 뜨거운 사막기후에서 일하는 것을 꺼리자 그 틈을 우리가 지집고 들어간 것이었습이다. 또 중동국가들은 다른나라들과는 달리 우리나라에게는 정상적인 가격에 석유를 팔아줬습니다. 자기들의 인프라를 지어주고 있는 나라에 비싸게 팔 수는 없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1차 오일쇼크는 끝났습니다.
2차 오일쇼크
이렇게 위기를 잘 넘겼지만 불과 5년 후 두번째 위기인 2차 오일쇼크가 1978년 이란의 회교도 혁명으로 인해 터졌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1차 오일쇼크때와 달리 무난하게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 5년전 1차 오일쇼크 때 보다 중화학공업이 더 고도화 되었고 국가 산업에서 그 비중이 매우 커져서 한국경제는 석유에 훨씬 더 의존적인 산업구조를 갖게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의 유가가격 급등과 해외수출의 급격한 감소는 우리경제를 나락으로 빠뜨렸고 박정희 정부 출범 이후 최초로 1980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게 만들었습니다.
심각한 비효율과 인플레이션
박정희 정부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을 짓고 중화학공업을 시작할 무렵부터 경제개발을 정부가 주도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 경제정책이 옳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가 점점 커지고 고도화 되면서 정부가 계획하고 주도하는 모델은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거기다가 2차 오일쇼크로 인해 수출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민간과 공기업을 막론하고 기업의 가동률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그렇다보니 실업률도 3.8%에서 5.2%로 높아졌고 인플레이션도 심각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의 이유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통화증발이었습니다. 제가 1차 오일쇼크때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로인해 갑자기 외하가 급속히 들어오자 통화증발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때 남아도는 돈이 물가상승을 부추겼고 동시에 부동산으로 흘러들어가 부동산 투기가 성행했었습니다.
통화증발의 두번째 원인은 바로 보조금 지급이었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중화학 공업정책을 실행하면서 많은 정부투자가 실행되고 이는 사실 통화증발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또 박정희 정부시기에는 중동건설 붐 시기 외에는 국제수지가 계속 적자였습니다.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보조금을 주는, 한마디로 돈을 찍어서 줬습니다. 2차 오일쇼크 당시 인플레이션이 1년에 20~30%까지 올라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즉 다시 정리해드리면 전두환 정권이 등장한 1980년 말의 한국경제는 경제성장도 마이너스, 국제수지는 적자, 물가는 20~30%의 인플레이션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전두환 정부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저는 이것을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전두환 정부의 공을 하나하나 본격적으로 다루면 여러분들도 공감하실 것입니다. 전두환 정부의 경제는 전형적인 개발도상국 경제 스타일에서 선진국 형의 경제스타일로 변모해 나가는 변화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