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마르크스(맑스)의 공산당 선언 비판 2 - 계급투쟁의 역사(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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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맑스)의 공산당 선언 비판 2 - 계급투쟁의 역사(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by 개인주의자 2024. 5. 3.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자유민과 노예, 도시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도, 길드 장인과 직인, 간단히 말해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늘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암암리에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이 투쟁을 전개해 왔다. 이 투쟁은 언제나 사회전체의 혁명적 개조를 가져오면서 끝나든지, 아니면 서로 싸우던 계급이 모두 몰락함으로써 끝이 났다. - 임승수,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18page

 

마르크스(맑스)의 공산당 선언 비판 시리즈

마르크스(맑스)의 공산당 선언 비판 1 - 공산주의의 유령

 

마르크스(맑스)의 공산당 선언 비판 3 - 세계 시장에서 부르주아의 착취

마르크스(맑스)의 공산당 선언 비판 4 - 노예가 된 노동자들(프롤레타리아들)

마르크스(맑스)의 공산당 선언 비판 5 - 사유 재산 제도 폐지

마르크스(맑스)의 공산당 선언 비판 6 - 부르주아(기업가)의 노동자(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

마르크스(맑스)의 공산당 선언 비판 7 - 노동자(프롤레타리아)들의 투쟁과 러다이트 운동

마르크스(맑스)의 이야기는 일부분 맞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맑스)는 사회적 인간관계에 대해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언제나 계급투쟁을 해왔고 뭔가 뒤집어엎는 사회적 개혁 또는 두 계급이 싸우다가 전부 몰락하면서 끝이 났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르크스(맑스)의 주장은 일부분 맞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인류역사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있어왔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휴전선 위쪽에 북한이라는 지역에는 억압자인 김정은과 지배계급이 있고 피억압자인 인민대중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도 백인 주인계급과 흑인노예계급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의 경우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요? 인민대중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거나 외부세력이 무력으로 깰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맑스)

 

 

그러나 마르크스(맑스)는 오버했다

1. 모든 인간관계를 두 계급으로 나눌 수 있는가?

여기서 두 계급은 바로 마르크스(맑스)가 말한 억압자와 피억압자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녀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두 친구의 관계, 형님과 아우의 관계 등 이 모든 관계들을 단순히 두 계급으로 나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 절대왕정 시대라고 해서 그 왕이 무조건 백성을 억압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생깁니다.

 

마르크스(맑스)의 말대로라면 세종대왕은 당시 조선백성들의 억압자였다는 말입니까? 그런 억압자가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손수 만드신다는 말은 뭔가 앞뒤가 안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맑스)가 규정한 대로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가 두 계급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그야말로 오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2. 두 계급(억압자와 피억압자)간의 관계는 항상 혁명 또는 몰락으로 끝났는가?

인류역사를 보면 두 계급의 관계가 끝날 때 아래에서 뒤집는 혁명 또는 두 계급 모두의 몰락으로 끝나는 상황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흑인노예의 해방을 살펴봅시다. 영국에서 흑인노예해방은 같은 백인이었던 올리버 윌버포스에 의해 끝났습니다. 원래 윌버포스 또한 노예무역을 했던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도로 회심한 후 흑인노예해방을 위해 힘썼고 그로 인해 영국의회에서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됨으로써 영국에서 노예해방이 된 것입니다.

 

미국 또한 링컨의 남북전쟁으로 인해 노예가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남북전쟁 전 이미 북부에서는 사회적 현상에 의해 노예해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북부의 경우 공업이 발달했고 남부의 경우 대규모 플랜테이션으로 인한 농업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마르크스(맑스)가 어떤 생산수단을 개인소유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주아, 그 생산수단에서 노동을 하는, 즉 생산수단을 개인소유로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분류했습니다.

 

원래 부르주아라는 단어는 성에 둘러싸인 중세시대 도시국가의 주민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근대에 들아와서 절대왕정의 중상주의 경제정책으로 부를 쌓은 사람으로 그 의미가 바뀐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맑스)의 말대로 부르주아 계급은  항상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억압할까요?

 

마르크스(맑스)가 살던 시대는 어떠했는가?

마르크스(맑스)가 살던 시대상을 보면 당시에는 아동노동이 당연하게 생각되었고 아동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는 하루 15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었습니다. 그에 반에 월급은 말 그대로 먹고 마시고 자는 비용, 즉 사람이 노동한 후 잠시 먹고 마시고 쉬면 다시 노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딱 그 비용만 준 것입니다. 그러니 노동자의 삶은 매우 비참할 수밖에 없었고 이 모습을 본 마르크스(맑스)는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억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현재 두 계급의 관계는 어떠한가?

현재도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억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노동조합과 노동법이 있어 노동자들은 법률에 의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받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월급 수준도 마르크스(맑스)가 살던 시대와는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언제라도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현재 부르주아 계급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과거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있다가 자신의 월급을 모아 사업을 시작하여 부르주아 계급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생산수단이라는 것을 단순히 공장이나 땅 같은 전통적인 개념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재능이나 여러 능력도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신의 임의대로 자유롭게 부르주아 계급이 세운 기업의 주식에 투자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수익 창출도 가능합니다.

 

사회적 인간관계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마르크스(맑스)는 사회적 인간관계 자체를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계급투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회적 인간관계는 그렇지도 않고 또 그런 의도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여러분은 중세시대 때 봉건사회라는 단어를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 봉건사회가 시작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노르만 족의 서유럽대륙 침입이 활발해지자 이 침입으로 인해 백성들은 많은 피해를 봤고 이 백성들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영주, 기사, 평민으로 이루어진 봉건사회가 시작됩니다. 말 그대로 처음에는 보호라는 명목으로 이런 계급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며 이것이 억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앞서 예들 들었던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등의 관계도 얼마든지 억압적인 관계로 변질될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변질될까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부터 악하며 우선순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성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합니다. 여러분들은 아기가 왜 악하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항상 죄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착한 사람들도 어떻게 보면 죄를 지을 능력이 없어서 죄를 안 지고 있는 경우도 있고 또 죄성이 여러 가지로 억압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모든 인간에게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가장 우선순위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두번째가 가족, 친지이고 세 번째가 가까운 친구, 이웃 등입니다. 즉 자기 자신이 편하게 살기 위해 그리고 자기 가족이 편안하게 살기 위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을 억압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북한정권과 지배층은 왜 인민들을 저렇게 억압할까요? 그것은 김정은 개인이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가 가장 우선적인 것이고 두 번째가 자신의 자녀를 포함한 가족들이 편안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극소수 지배층만을 거느리고 나머지 인민들을 저렇게 억압하는 것입니다.

 

북한정권의 본질에 대해 알고 싶다면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왜 실패했는가?를 참조하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관계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는?

관계가 억압적 관계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위해서는 먼저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이 지켜져야 합니다. 또 법을 안 지켰을 경우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형벌이 무서워서라도 죄성이 억압됩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바로 종교입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경우 하나님이라는 전지전능한 인격신을 믿습니다. 그 인격신이 나와 함께하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있다면 그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악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를 표방한다는 곳에서는 종교를 모두 말살해 버렸습니다. 오히려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규정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하니 더 도덕성이 없어지고 결국 억압과 숙청으로 점철된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