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이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명령 없이는 군 병력 절대 출동 금지'라는 명령을 어기고 무단으로 자신이 지휘하는 예하 부대들을 출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따라서 반란군은 전두환과 신군부가 아닌 정승화 계열의 지휘관들, 즉 장태완과 윤성민이었던 것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7에 이어 12일 자정 이후 부터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포스팅하려 합니다. 따라서 먼저 타임라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시리즈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1 - 시리즈를 시작하며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2 - 전두환은 어떻게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었는가?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3 - 10.26사건의 전말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4 - 정승화의 수상한 행적이 드러나다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5 - 정승화와 김재규, 사태를 악화시키다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6 - 전두환, 정승화에 대한 체포와 연행을 준비하다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7 - 12.12사태의 시작, 정승화 연행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9 - 12.12 이후 최규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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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PM 12시 00분 - 장태완, 서울시내에 군 장비 배치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단지 정승화를 빼내겠다고 서울시내 한복판에 군 장비를 배치시켰습니다. 그 장비의 규모는 이렇습니다.
전차 20대, 장갑차 30대, 토우 대전차 미사일, 3.5인치 로켓포
김용삼, [김용삼의 근현대사 산책] 19.12∙12(1979) 중에서
장비의 배치 위치는 현재는 없어진 것으로 보이는 충무로 역 근처 아스트리아 호텔 앞이었습니다. 위치를 지도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지도에서 A지점은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 B지점은 경복궁으로서 대통령을 경호하는 부대인 30 경비단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C지점이 바로 장태완 장군이 군 장비를 배치한 곳입니다.
12월 13일 AM 00시 10분 - 장태완, 김포에 있는 예하부대에게 30 경비단과 합수부를 조준하라고 명령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군 장비를 C지점에 배치시킨 후, 김포에 있는 수경사 예하부대에게 주둔지 김포에서 30 경비단과 합수부에 포를 조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자주포로 수십 km밖에 있는 목표를 정밀타격하는 것은 요즘 개발된 K9쯤 되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K9과 같은 정확도가 나오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도에서 보시듯 30경비단은 청와대 바로 아래 경복궁 내에 위치해 있었고 합수부가 있던 보안사령부도 그 근처였습니다. 만약 조금만 잘못 쏘면 포탄이 민가뿐 아니라 청와대 경내에도 떨어질 수 있던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몰랐을리 없는 장태완이 김포에 있는 자신의 예하부대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면 정승화를 구출해 내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시민들이 피해를 봐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 아닐까요? 과연 이게 반란이 아니면 뭐가 반란일까요?
12월 13일 AM 00시 10분 - 전두환, 장태완과 9공수여단을 국가반란세력으로 규정
사태가 이렇게 되니까 전두환 본부장은 국방부 장관의 명령을 어기고 불법으로 군 병력을 출동시킨 장태완과 9 공수여단을 국가반란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를 국방부 차관에게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그럼 전두환이 뭔데 이들을 국가반란세력으로 규정하고 보고했는가?
전두환 본부장은 원래 보안사령관으로서 한시적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이 보안사령부가 바로 국가 대전복 임무를 하는 곳이고 그곳의 사령관은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반란세력이 나타나면 보안사령관은 이들로부터 대통령과 정부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12월 13일 AM 1시 30분 - 노재현 장관, 국방부로 옴
노재현 국방장관이 드디어 도피를 끝내고 미8군 상황실에서 헌병에 이끌려 국방부로 왔습니다. 국방부에 복귀한 즉시 노재현 장관은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로 갔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이없게도 노재현 장관의 도피는 또 시작되었습니다.
노재현 장관이 다시 도피한 곳은 다름아닌 국방부 건물내부에 있는 계단 아래였습니다. 노재현 장관의 국방부 건물 내에서 도피한 이유는 제1공수여단이 국방부 진입도중 국방부 청사 옥상에 있는 수경사 방공포단으로부터 발칸포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국방부 건물 내에 총성이 들리자 노재현 장관은 그 즉시 국방부 건물 계단 밑으로 도피해버린 것입니다.
12월 13일 AM 2시 00분 - 노재현 장관, 강제복귀 됨
국방부 청사 계단 밑에서 또 도피를 하던 노재현 장관은 국방부 청사내로 진입한 공수여단에 의해 청와대로 강제 복귀되었습니다. 복귀 후 정승화 체포와 연행에 대해 사후 재가를 내렸습니다. 노재현 장관은 왜 도피했을까요? 단순히 무서워서?
이분도 국방장관일때는 당연히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그전에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무서워서 도피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좌우지간 전두환 본부장이 12.12이전 세 번이나 정승화의 체포와 연행에 대해 보고했을 때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하고 정승화를 보직해임 시켰다면 12.12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 12.12때 도피하지 않고 초기에 정승화 체포, 연행에 대해 재가를 내렸다면 이후 군 병력까지 출동시키는 일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노재현 장관의 기이한 도피행각이 12.12사건을 촉발시킨 것은 분명합니다.
12월 13일 AM 3시 30분 - 장태완과 정승화 계열 장군들 체포
전두환 본부장은 국방부 장관의 명령을 어기고 무단으로 군 병력을 출동시킨 장태완을 비롯한 정승화 계열 장군들을 반란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체포하기에 이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두환이 이들을 반란세력이라고 규정한 것은 자신의 임무였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으로서 한시적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보안사령부가 하는 일이 대전복 업무이기 때문에 반란세력을 규정하고 진압하는 것은 그의 임무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반란세력에 대한 소탕작전을 하기 전에 먼저 국방부 차관에게 해당 사실을 보고하고 정부군 출동을 건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에게도 이 사실을 보고하고 대전복 업무를 위해 정부군 출동을 건의했습니다. 이 건의가 재가됨에 따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특전사 3개 여단과 추가로 두 개 부대에게 출동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출동한 부대를 보면
1 공수여단 - 12월 13일 AM 00시 30분 육군본부, 국방부에 진주
2 공수여단 - 12월 13일 AM 3시 30분 중앙청(광화문)에 진주
5 공수여단 - 12월 13일 AM 6시 00분 효창운동장 진주
추가로 2기갑여단과 9사단 1개 연대 추가 출동요청 - 김용삼, [김용삼의 근현대사 산책] 19.12∙12(1979) 중
또한 조홍 헌병단장에게 명령하여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을 체포했습니다. 이것으로 12.12사태는 모두 정리되었습니다.
장태완, 최규하 대통령 납치 계획을 세우다
장태완은 자신이 군인으로서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수경사령관으로 임명한 정승화에 대해 충성하기로 마음먹은 듯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정승화를 구출해 내기 위해서 대통령까지 납치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정찰까지 보냈는데 그 정찰임무를 김진기 헌병감이 직접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찰결과 임 경호실 요원들이 경비를 대폭 강화했기 때문에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즉 장태완은 국가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 큰 충돌없이 모두 진압되었을까?
장태완, 정병주, 윤성민 등 정승화 계열 장군들이 자신의 예하부대를 출동시키고 심지어 대통령을 지키는 부대인 30 경비단과 보안사령부를 공격하라고 명령까지 했음에도 어떤 유혈사태 없이 끝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1) 불합리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장군들은 명령을 내렸지만 그 아래 있던 수많은 장교들이 불합리한 명령임을 알고 명령에 불복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장태완이 충무로 아스트리아 호텔앞에 배치한 부대의 경우 장태완의 명령을 어기고 모두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에 장태완은 격분해서 총을 들고 모두 사살하겠다며 그들을 찾아다녔었습니다.
당시 장태완의 명령은 한마디로 대통령을 공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30 경비단이 대통령을 지키는 부대였기 때문입니다. 또 위의 지도에서 보시듯 30경비단이 있었던 경복궁과 청와대 그리고 보안사 서로의 거리는 단 1km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포에서 포를 조준해서 쏘면 청와대나 근처 민가에 포탄이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수경사 예하의 장교 450명 중 60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자신의 직속상관의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2) 정승화 체포, 연행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승화 체포와 연행에 대해 당시 군내에서는 당연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두환 회고록 1권을 보면 정승화가 대통령 시해사건과 상당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안 전두환의 선배이자 정승화와 친했던 유학성, 황영시 장군 등이 전두환 본부장에게 왜 정승화에 대한 수사를 안 하냐며 압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정승화 계열의 장군들이었던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이건영 3군 사령관 등도 정승화의 체포와 연행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특히 이건영 3군 사령관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국방장관의 명령을 어기고 군대를 출동시키자 장태완에게 전화를 걸어 모두들 정승화의 체포와 연행을 인정하는데 왜 당신만 오버하냐며 난리 쳤다고 합니다.
이러한 군내의 기류가 당연히 모든 장교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이것이 평화롭게 12.12가 마무리되는 이유였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