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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7 - 12.12사태의 시작, 정승화 연행

by 개인주의자 2024. 10. 26.

저번 포스팅인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6까지 12.12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사전지식을 공부하신 것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12.12사태의 전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역시 여러분들이 12.12사건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도록 타임라인을 먼저 제공하겠습니다.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시리즈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1 - 시리즈를 시작하며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2 - 전두환은 어떻게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었는가?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3 - 10.26 사건의 전말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4 - 정승화의 수상한 행적이 드러나다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5 - 정승화와 김재규, 사태를 악화시키다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6 - 전두환, 정승화에 대한 체포와 연행을 준비하다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8 - 12.12사태의 끝, 반란군 진압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9 - 12.12 이후 최규하 정부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12.12사태도 12일 저녁 무렵부터 13일 새벽까지 매우 짧은 시간 동안 펼쳐진 사건이었습니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정승화 체포, 연행을 하기 위해 계획을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계획을 살펴보겠습니다.

 

12일 18시 30분 -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체포, 연행에 대한 보고

12일 19시 00분 - 전두환 본부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들어간 후 30분 뒤 정승화 체포, 연행작업 시작

체포조는 우경윤 대령, 허삼수 대령으로 함

김용삼, [김용삼의 근현대사 산책] 19.12∙12(1979) 강의 중

 

12일 PM 6시 30분 -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

전두환 본부장은 정승화를 체포, 연행하기 전, 최규하 대통령에게 가서 보고했습니다. 본부장의 보고시간과 체포조의 활동 시간 차이가 30분 밖에 나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최규하 대통령이 보고 후 즉각 재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자신은 국무위원인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보고받아야 한다며 국방장관이 배석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노재현장관은 무슨 일인지 도피하여 연락두절이 돼서 7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2일 PM 7시 10분 - 정승화의 체포, 연행 불응과 총격전

정승화는 체포, 연행에 협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경호하는 부하들에게 허삼수와 우경윤을 잡으라고 명령했을 뿐 아니라 당시 정승화 자택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것도 정승화 측에서 먼저 발포했기 때문입니다. 이 총격전으로 우경윤 대령은 허리에 총을 맞아 하반신 불구가 되어 평생 휠체어를 타고 다녔습니다.

 

정승화 체포, 연행과정에서도 전두환과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켰다는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체포조에 포함되어있던 우경윤 대령의 신원 때문이었습니다. 우 대령은 전두환의 부하가 아니라 정승화의 신임을 받는 부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우경윤 대령은 당시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으로서 보안사령부에 속해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사람이 정승화 체포와 연행에 가담했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12일 PM 7시 10분 - 노재현 국방장관 도피

당시에는 국방부 건물과 육군참모총장 공관이 가까웠나 봅니다. PM 7시 10분 경 정승화 총장 자택에서 여러 발에 총소리가 나자 노재현 국방장관의 7시간 도피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노재현 장관이 왜 도피했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노재현 장관의 도피가 12.12사태의 주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12일 PM 8시 정각 ~ 8시 50분 - 혼선을 빚은 군부

황당하게도 육군참모차장인 윤성민 차장이 정승화의 신변에 대한 보고를 받기를 '괴한에게 납치당했다'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윤성민 차장은 그에 대한 조치로 8시 10분 수도권 전역에 진돗개를 발령시켰습니다.

 

그러나 10분 뒤 윤성민 차장은 정승화가 괴한에게 납치된게 아니라 수사를 위해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윤성민 차장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당장 진돗개 발령을 해제시키고 자신과 같은 정승화 파벌이었던 사람들에게 이를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윤성민 차장은 알리지 않았습니다.

 

12일 PM 8시 50분 ~ 9시 30분 - 사태를 정리하기 위한 노력

이때 장군들은 악화되어가는 사태를 정리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PM 8시 50분 30 경비단에 모여있던 유학성, 황영시 장군은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통화를 하고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합법적인 수사를 위해 합수부에 안전하게 연행되어 있다는 말을 장태완에게 해줍니다.

 

그러나 장태완은 상당히 황당한 반응을 보입니다. 아래 짧은 동영상을 클릭해주세요.

 

 

 

당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선배들과의 전화통화에서 왜 이렇게 비 이성적 반응을 보였을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1, 자신을 수경사령관으로 임명해 준 정승화 계엄사령관에 대한 맹목적 충성

 

2. 후배 조홍 헌병단장의 장성진급축하파티에서 음주를 많이 하여 술에 취해 있었음

 

이 때문에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큰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시 30 경비단에 모여있던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장군을 비롯한 7명의 장군들이 9시 30분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면담을 하면서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체포,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국방장관 데리고 오라며 이 장군들의 청도 거절했습니다.

 

12일 PM 10시 10분 ~ 10시 15분 - 노재현과의 첫 통화

노재현 국방장관은 같은 날 7시 10분경 국방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육군참모총장 자택에서 총성이 울리자 바로 근처에 있던 단국대학교 캠퍼스로 도피했습니다. 그러다가 용산에 있는 미 8군 경내로 장소를 옮겨 도피하던 중 청와대 및 국방부 차관과 처음으로 통화를 했습니다.

 

이 통화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어디 있냐며 즉시 청와대로 들어올 것을 지시했으나 장관은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도피했습니다. 또한 국방부 차관은 군내 혼란이 가중되자 국방부 장관에게 군 병력 출동금지를 명령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노재현 장관은 합참본부장에게 전화 걸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명령 없이는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진짜 반란세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2일 PM 11시 00분 -  윤성민과 장태완, 자신 휘하부대들에 출동명령

정승화 계열이자 정승화에 의해 임명된 윤성민과 장태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병력출동 금지'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의 휘하 부대에 병력출동을 명령합니다. 즉 흔히 아는 것처럼 병력을 처음 출동시킨 쪽이 전두환과 신군부가 아니라 정승화 쪽 지휘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 그대로 군을 통솔하는 대통령을 제외한 최 상급자인 국방부 장관의 명령을 정면으로 어긴 것으로서 이것이야말로 군사반란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13일에 있었던 사건은 다음 포스팅으로 넘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