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와 정승화가 공모했다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상황은 점점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김재규가 재야 좌파 법조인들의 코치를 받아 민주투사로 둔갑하기 시작했고 정승화는 군권장악을 위해 군내 주요보직과 수도권과 관련된 보직에 김재규와 자신의 사람들을 임명하고 있었습니다. 또 정승화를 체포, 연행하는데 있어 법적인 어려움도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나가고 있었습니다.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시리즈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1 - 시리즈를 시작하며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2 - 전두환은 어떻게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었는가?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3 - 10.26사건의 전말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4 - 정승화의 수상한 행적이 드러나다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5 - 정승화와 김재규, 사태를 악화시키다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7 - 12.12사태의 시작, 정승화 연행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8 - 12.12사태의 끝, 반란군 진압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9 - 12.12 이후 최규하 정부
빨간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정승화 체포와 연행에 대한 법적 어려움
제가 12.12는 군사 반란이었을까? 2 - 전두환은 어떻게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었는가?에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직제에 있는 기관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두환이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것도 법적 자격을 통해 정승화의 임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승화가 합동수사본부가 수사하는 10.26사건에 연루가 되어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법적으로 어렵게 된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합동수사본부에 관한 법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계엄사령부직제 제7조
4항 - 합도수사본부장과 합동수사단장은 계엄사령관의 명을 받아 소관업무를 처리하며 소속직원을
지휘 · 감독한다.
5항 - 합동수사본부와 합동수사단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 · 통제업무를 관장한다.
나무위키, 계엄사령부직제
위 조항을 보면 어떤 사람을 체포하고 조사할 것인지 모두 계엄사령관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체포하고 조사해야할 사람이 계엄사령관 본인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전두환,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다
정승화에 대한 체포와 연행에 대해 정승화 본인이 허가할 수 없기때문에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에 대한 인사권과 통제권이 있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아가 보고했습니다. 그것도 세 차례나 가서 보고했음에도 모두 거절딩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12.12때 정승화가 체포, 연행되자 노재현 장관은 10시간 동안 연락두절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미스테리한 사건을 볼 때 노재현 장관도 10.26사건과 뭔가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만약 노재현 장관이 수사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정승화를 경질시켰다면 무난하게 모든 사태가 해결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됨에따라 전두환은 대통령에게 찾아가 직접 보고하고 정승화를 체포, 연행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전두환, 30경비단 모임을 주최하다
좌파들은 이 30경비단 모임을 군사반란을 모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논리는 이 모임에 모인 사람들이 누군지를 알면 바로 깨져버립니다. 또 좌파들은 할 말 없으면 다 하나회로 몰아붙이는데 과연 그 사람들이 전부 하나회였을까요? 당시 30경비단 모임에 모인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유학성 - 국방부 군수차관보, 차규헌 - 수도군단장, 황영시 - 1군단장, 노태우 - 9사단장, 박준병 - 20사단장, 박희도 - 1공수여단장, 최세창 - 3공수여단장, 장기오 - 5공수여단장, 조홍 - 수경사 헌병단장, 김진영 - 수경사 33경비단장
위 장군들을 정승화를 체포, 연행하려고 계획한 날 초청하여 모임을 가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노태우를 빼고는 일부는 전두환 보다 선배들로서 구군부에 해당되고 동시에 정승화와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구군부나 선배는 아니었지만 정승화와 가까운 수도권 지역 부대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장군들을 불러 정승화를 체포, 연행 할 때 정승화가 거부하거나 하면 군 내에 계파에 따라 갈등이 벌어질 것을 생각하고 갈등을 무마하기 위해 정승화 체포, 연행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려고 부른 것입니다. 이렇게 전두환은 군내 갈등을 최대한 피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정승화에 대한 군사반란을 모의하는데 정승화와 친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모의한다는게 말이 됩니까?
전두환은 12.12를 어떻게 임했는가?
전두환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 연행할 생각을 하면서 그 심정이 과연 어땠을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전두환이 가족들에게 한 말에서 잘 드러날 것입니다. 부인 이순자 여사의 회고록 '당신은 외롭지 않다'를 보면 전두환 본부장은 자녀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잘 들어라. 세상이 지금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평생을 대통령 각하께 은혜를 입고 출세해온 자가 자기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욕심으로 은인을 살해했다. 그런데도 잘못된 시류는 그런 배은망덕한 인간을 민주투사인 양 호도하려 하고 있다. 이 아버지가 박 대통령 시해사건을 수사하면서 무슨 생각을 가장 많이 했는지 아느냐? 각하께서 살아계실 때는 그토록 총애를 다투던 사람들이 막상 각하가 저격을 당해 쓰러지시자 모두 도망쳐버렸다.
중략
그런데 지금 그 사건의 수사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이 아버지도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수사결과 강력한 용의자가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막강한 힘을 갖고 있어서 아버지가 시해사건의 전모를 밝히려 하다가는 자칫하면 내 목숨과 명예, 아니 우리의 모든 것까지도 잃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너희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중략
아버지는 이 역사적인 대사건의 수사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이 사건이 미궁에 빠져들지 않도록 철저히 진상을 규명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
이순자, 당신은 외롭지 않다. 189~191page
위 인용문은 사실 너무 길어 중요부분만 발췌한 것입니다. 전두환 본부장도 대단히 어렵고 위험하게 상황을 인식한 듯 합니다. 그래서 내용을 보면 거의 유언과 같이 자녀들에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정승화 체포와 연행에 대한 계획을 만들다
정승화가 김재규와 상당한 범행공모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문제로 정승화에 대한 조사에 어려움이 많아지자 계엄사령관의 상관인 국방부 장관에게 세번이나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거절당하는 등, 모든 절차를 거친 전두환 본부장은 더 이상 방법이 없자 부하들로 하여금 정승화 체포, 연행에 대한 계획을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어디까지나 체포, 연행에 대한 계획이었지 군사반란을 하기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정승화 체포와 연행이 불법이었느냐? 하는 것인데 김용삼 기자에 따르면 법적 근거는 이것입니다.
12.12당시 군법회의 법 제242조
긴급을 요하여 관할관의 구속영장을 받을 수 없을 때는 그 사유를 고하지 않고 영장없이 피의자를 구속할 수 있으며 구속한 때로부터 48시간 이내에 구속영장을 발부하도록 규정
김용삼, [김용삼의 근현대사 산책] 19.12∙12(1979) 강의 중에서
정승화 자신의 중대한 혐의가 발견되었음에도 당사자의 지속적인 수사방해와 군내 장악시도로 인해 긴급을 요했으나 관할관 또한 정승화 당사자이기 때문에 구속영장을 발급받을 수 없었으므로 해당 조항이 12.12의 근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