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죽어도 핵무기(핵 미사일)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기에 여러 포스팅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김정일 시기에 김정일 본인과 북한 정권 차원에서의 경험을 쓰고자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슨 내재적 접근법이라고 해서 북한이 핵무기(핵 미사일)를 개발하고, 주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잔인한 폭압정치를 하는 등에 대해 그들의 내재적인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미친소리를 하려는게 아니고 제발 북한의 핵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우리 대통령과 김정은이 정답게 마주 앉아 냉면 한 그릇 먹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 입니다.
김일성의 개인적 경험 - 북한이 핵무기(핵 미사일)에 집착하는 이유 1
김일성 집권기에 대한 경험 - 북한이 핵무기(핵 미사일)에 집착하는 이유 2
김정은 집권기에 대한 경험 - 북한이 핵무기(핵 미사일)에 집착하는 이유 4 를 참조하시기를 바라며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넘어갑니다.
김정일 집권 시기
김정일은 아버지인 김일성이 사망한 직후인 1993년부터 사망한 2011년 말까지 북한의 독재자로 집권했습니다. 김일성 집권 말기부터 내려앉기 시작했던 북한을 이어받아 집권하면서 김정일 시기에는 북한체제의 고유한 특성들이 무너졌습니다
김정일 집권 시기의 경험
1.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심화
80년대 말 부터 92년까지 동구권의 붕괴, 소련의 붕괴로 북한은 자신과 함께 해왔던 동료들이 없어졌습니다. 그럼으로써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이 심화되었으며 자신의 종주국을 이어받은 러시아와 한국의 수교, 동구권이었던 동유럽 국가들과 한국의 수교는 북한의 고립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2. 남북간 경제력 및 군사력 격차 심화
70년대 중반부터 남한에게 경제력 면에서 추월당했고 1988년 올림픽 이후부터 경제력 격차가 더욱 심해졌고 반대로 북한경제는 원조를 받았던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원조가 줄어들면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런 북한경제의 후퇴는 90년대 말에 있었던 고난의 행군이라는 비참한 상태까지 이어집니다.
군사력은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합니다. 또 여러 가지 북한에 대한 제재가 시행되면서 북한경제가 더욱 침체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엄청난 군사력의 유지는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또 이미 장비가 아주 노후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제력이 그렇다 보니 장비도 바꾸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탱크, 전투기, 자주포 등 여러종류의 재래식 무기를 만들거나 수입하고 유지하는 것은 매우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핵무기(핵 미사일)의 제작 및 유지는 그에 비해 매우 저렴합니다. 거기다가 핵무기(핵 미사일)이라면 누구나 그 공포심이 있어 한마디로 매우 가성비가 높은 것입니다.
3. 카다피의 죽음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가 김정일 집권말기인 2011년 10월 20일에 사망합니다. 카다피는 아프카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을 목격하면서 서방과 화해하는 것이 리비아의 살 길이라고 생각하여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선언하여 유엔과 미국의 대 리비아 경제제재에 대한 해제를 이끌어 냈고 리비아의 경제를 개방하여 해외투자를 적극 유치했습니다.
또 카다피는 국제적으로 또 북한에게도 핵무기(핵 미사일)를 포기하라고 종용했었습니다. 그러나 카다피의 또 다른 측면인 테러에 관한 사항들을 보면 그는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라도 이렇게 친 서방정책을 펼쳤던 카다피가 2011년 1월에 일어난 튀니지 혁명의 영향이 리비아에 까지 불어닥치자 리비아 민주화 반군과 맞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서방의 지원을 받은 반군이 수도인 트리폴리까지 장악하게 되고 2011년 9월 7일 반군이 카다피 일당을 포위하고 약 한 달 후 사망합니다.
이런 모습을 본 김정일과 북한정권은 핵무기(핵 미사일)를 포기했다가는 카다피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4. 걸프전쟁, 이라크 전쟁
이라크는 1990년 8월 2일 최정예 공화국 수비대 30만 대군을 전격적으로 투입해 쿠웨이트를 점령합니다. 이에 미국 및 서방국가들은 이라크에게 쿠웨이트에서 물러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지만 말을 듣지 않아 미국이 사막의 방패작전이라는 이라는 명칭을 통해 이라크를 공격했으며 개전 후 한달도 안돼 미국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라크 전쟁은 2003년 3월 20일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숨겨놓고 있다는 근거없는 주장하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전쟁입니다. 이라크 점령은 개전한 지 한 달도 안 된 4월 9일에 끝났으나 점령 후 이라크 안정화에 실패하며 막대한 재원을 소요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공포심을 자극하다
이 국외적 경험이 김정일과 북한정권의 공포심을 자극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카다피의 죽음을 통해 핵무기(핵 미사일)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며 아무리 친서방 정책으로 나간다 해도 서방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어떤 형식으로도 자신들을 없애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 두차례에 걸친 이라크에서의 전쟁을 통해 사담 후세인이 결국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며 김정일과 북한정권은 미국에 대한 공포심이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비단 또 한 번 남침 시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미국이 자신을 공격하려고 할 때 미국본토에 핵무기(핵 미사일)를 투사하여 침략을 방지하려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공포심은 6자회담에서 드러나다
6자 회담은 김정일 집권시기인 2003년 8월 1차 회담부터 2007년 9월 6차 회담까지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북한, 남한 6개국이 북한의 핵무기(핵 미사일) 개발을 의제로 연 회담입니다. 이 회담을 다룬 책이 있는데요. 후나바시 요이치라는 기자가 쓴 김정일 최후의 도박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후나바시 요이치라는 저널리스트가 6자 회담의 현장에서 있었던 내용을 쓴 책입니다.
저는 사실 이책만큼 지겨운 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내용이 뭔가 진전되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를 도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이 서로를 불신하고 있는 북한과 미국을 중재하여 각국 대표들을 다시 자리에 앉혀놓으면
북한 대표 - 미국이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을 해줘야 한다.
미국 대표 - 어떤식으로 해줘야 하는가?
북한 대표 - (제 기억으로) 미군을 배치해 달라.
미국 대표 - 그것은 불가하다. 대신 우리가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을 천명해 주겠다.
북한 대표 - 그것을 어떻게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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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표 - 북한은 핵무기(핵 미사일)를 한 번에 포기해야 한다(이른바 CVID).
북한 대표 - 우리가 핵무기(핵 미사일)를 포기할 경우 미국의 안전보장을 어떻게 믿는가? 그러니까 단계적으로 포기수순을 단계적으로 해서 단계마다 보상해 달라.
미국 대표 - 단계적으로 하면 우리는 북한의 핵무기(핵 미사일)에 대한 완전한 포기를 어떻게 믿는가? 당신들은 보상만 받고 마음에 안 들면 다음 단계를 안 할 것이 아닌가?
북한 대표 - 우리는 우리가 핵무기(핵 미사일)를 포기했을 경우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을 믿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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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전혀 진척이 없이 계속 같은 상황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북한의 공포감이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