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10 - 마오쩌둥(모택동)의 죽음과 문화(대)혁명의 끝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10 - 마오쩌둥(모택동)의 죽음과 문화(대)혁명의 끝

by 개인주의자 2024. 6. 18.

역사적으로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67년 까지 10년동안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1967년에 그렇게 지독했던 문화(대)혁명이 끝이났을까요?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시리즈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1 - 마오쩌둥(모택동)과 중국 인민들의 정신세계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2 - 문화(대)혁명의 시작, 해서파관 사건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3 - 해서파관 사건 이후에서 5-16통지까지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4 - 대중동원과 홍위병의 등장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5 - 홍위병들의 구호, 조반유리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6 - 홍위병들의 활동(폭력 및 살인)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7 - 홍위병들의 활동(문화재 파괴)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8 - 홍위병의 분열과 류사오치의 수난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 9 - 홍위병의 종말과 농촌으로 상산하향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마오쩌둥(모택동)의 죽음

1967년 6월 26일, 마오쩌둥(모택동)은 두번째 심근경색을 일으키며 쓰러집니다. 그후 약 3개월이 지난 1967년 9월 9일 마오쩌둥(모택동)은 완전히 숨을 거두고 사망했습니다. 마오쩌둥(모택동)의 사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크게 보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후 27년간 이어졌던 마오쩌둥(모택동)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작게보면 마오쩌둥(모택동)이 계속 지지하던 문화(대)혁명이 종말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아시다시피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모택동)의 의지로 또 그의 계략으로 일어난 10년동안의 천하대란이었습니다. 이제 그 천하대란의 구심점이 사망하고 없어진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4인방의 체포

마오쩌둥(모택동)의 계략에 따라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고 진행하는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4인방이 있었습니다. 그 4인방은 장칭(마오쩌둥(모택동)의 아내),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홍원 이 네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은 마오쩌둥(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들이었습니다.

 

이 4인방의 각각의 역할은

 

장칭 - 마오쩌둥(모택동)의 아내로서 4인방의 두목역할

 

왕홍원 - 상하이에서 혁명 지지 위원회를 결성해 세력을 키우는 임무

 

장춘차오 - 언론인의 경력을 이용해 혁명 지도 소조의 요직을 맡아 문화(대)혁명의 이론화와 체계화 담당

 

야오원위안 - 각종 논설을 통해 반대파에 대한 공격 방어

 

마오쩌둥(모택동)을 등에업고 문화(대)혁명을 이끈 4인방은 1976년 10월 6일 마오쩌둥(모택동)의 후계자 화궈펑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되었습니다. 이후 판결에서 장칭과 장춘차오는 사형 집행유예, 즉 2년간 별일없이 수감되어 있으면 무기징역으로 감면해주는 형을 받았고 왕홍원은 종신형, 야오원위안은 20년 형을 받았습니다.

 

이후 장칭은 2년뒤 종신형으로 감면되었으나 1991년 지병인 식도암 치료를 받기위해 병원에 있던 중 목을 매 자살했고 왕홍원은 감옥에서 병사, 야오원위안은 1996년, 장춘차오는 1998년 각각 가석방 된 후 2005년 두 사람 모두 병사했습니다.

 

4인방 -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왕훙원, 장춘차오, 장칭, 야오원위안 순이다.

 

문화(대)혁명 기간, 4인방은 어느정도의 권력을 누렸나?

이들이 한 일에 대한 예를들자면

 

이들은 방송과 신문을 장악한 후, 자신의 글을 언론기관을 통해 발표하면서 전 중국을 선동했다. 가령 이들이 중국중앙방송국이나 인민일보 평론을 통해서 XX성의 성장인 AAA는 반동이며 장제스의 숨은 추종자이다. 이자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XX성의 홍위병이 대거 일어나 관청 담벼락에 AAA를 비난하는 대자보나 표어를 붙여놓고 심지어는 AAA를 기습하여 폭행했다. 그러면 4인방 일파가 장악한 중앙에서는 이러한 홍위병의 고발을 핑계로 AAA를 해임하고 노동개조를 보내는 형식. - 나무위키 4인방 편

 

즉 AAA가 장제스의 숨은 추종자라는 근거가 없어도 이들이 언론과 신문에 글을 실어 우기기만 하면 홍위병 같은 무뇌들이 일어나서 알아서 처리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들에게 희생당한 사람은 10년의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몇명이었을까요?

 

마오쩌둥(모택동)의 죽음을 보며···

정말 자연사하지 않았어야 할 인간이 자연사 했습니다. 물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심근경색으로 인한 병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사고나 타살이나 자살과 같은 사인이 아니므로 자연사라고 봐도 될듯합니다. 저는 마오쩌둥(모택동)이 1949년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후 마오쩌둥(모택동)이 저지른 큰 두 사건에 대해 연재했습니다.

 

저도 모르는 부분이 많아 해당 도서를 읽고 중요한 부분을 발췌한 후 스토리텔링을 해서 포스팅을 작성하면서 느꼈던 것이 지도자가 되려면 정말 많은 공부를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한계로 그 많은 것을 전부 공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항상 해댱분야의 전문가를 등용해서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둥(모택동)이라는 인간은 이 두가지 모두 지겹도록 안했던 인간이었습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할 때 거드름 피우는 지식인들을 보며 적대감을 느꼈다는 대목에서 이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공부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반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지구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보복하는 것을 보고 무식하면서 고집센 놈이 절대 권력까지 가지면 나라가 절단나는구나 싶었습니다.

 

마오쩌둥(모택동)은 반론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권력욕만 쎄서 권력쟁취에만 탁월한 지능을 발휘하는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대약진 운동으로 4000만의 인민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이후 자기 권력을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수백만을 하늘나라로 보냈을 뿐만아니라 중국의 찬란한 수천년의 문화유산까지 전부 작살낸 인간이 자연사를 하고 현재도 모든 중국화폐에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마오쩌둥(모택동)의 대약진 운동 비판 시리즈의 첫 글

 

마오쩌둥(모택동)의 대약진 운동 비판 1 - 대약진 운동의 시작을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지도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마오쩌둥(모택동)의 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