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고평가 된 인물이 누구일까요? 저는 김구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가장 저평가된 인물은 이승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가 대통령에 됐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왜 김구가 아닌 이승만이 대통령에 되야 했을까요? 인물비교 이승만 VS 김구 - 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야 했는가?를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김구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생각이 찬성에서 반대로 바뀐 이유와 북한에 올라가 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등 갑작스럽게 바뀌어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어떻게 이용당했는지 쓰고자 합니다.
김구는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어떻게 이용당했나? 시리즈
김구는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어떻게 이용당했나? 2 - 회담 참석 및 농락
김구는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어떻게 이용당했나? 3 - 김구와 김일성의 의도
김구는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어떻게 이용당했나? 4 - 서영해와 성시백의 김구 포섭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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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원래 5.10총선거를 통한 대한민국 건국에 찬성했었다
김구와 김규식 등 임정계는 1948년 1월 중순까지만 해도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에 찬성했었습니다.
1947년 12월 1일 김구는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결국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고 하는 것은 유감" - 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167page
뿐만 아니라 김구는
1948년 1월 25일에도 김구는 "유엔 감시 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 - 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167page
라고 말하며 5.10 총선과 대한민국 건국을 찬성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김구는 총선거 실시에 제동을 걸었다
1948년 1월 25일에 5.10 총선거 실시에 대해 찬성발언을 했던 김구가 바로 다음날인 26일에 느닷없이 5.10 총선거 실시에 대해 제동을 거는 발언을 합니다.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상태로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두 나라 군대가 철수한 후 총선거를 해서 통일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 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168page
라고 말하며 하루만에 5.10 총선거 실시를 반대합니다.
왜 김구는 하루만에 총선에 대한 입장을 번복했을까?
하루 만에 갑자기 총선거에 대한 입장이 돌변한 이유는 김구의 추종자 중 한 사람이었던 조경한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조경한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서영해가 나타나 "남북한을 통틀어 총선거를 하면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실 텐데 무엇하려 이승만이 주도하는 남한만의 선거에 참여하려 하십니까? 김일성도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변심이 되었다. - 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168page
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서영해가 누굴까요? 서영해는 임시정부시절 주불 외교위원이었습니다.
또한 1997년 5월 26일자 노동신문은 성시백의 김구공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시백 동지는 4월 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극단 한 반동분자로 있던 김구 선생을 돌려세우는 사업체에도 큰 힘을 넣었다." - 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168page
김구와 김규식의 반대로 총선실시에 대해 엄청난 부담이 되다
독립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김구와 김규식의 총선 및 단독정부수립 반대에 따라 총선실시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김구와 김규식은 우익인사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그런 두 사람이 반대한다는 것은 큰 무게가 있었습니다.
이에 유엔한국임시위원에서는 한국의 우익지도자들 마저 총선실시에 반대하므로 선거를 연기하고 유엔본부로 돌아가 새로운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결국 유엔소총회는 1948년 2월 26일 유엔위원단이 활동가능한 남한지역에서 총선을 실시할 것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가결했습니다.
따라서 겨우 5.10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왜 정읍에서 단독정부 설립을 주창했을까요? 이승만의 정읍발언, 남북분단의 원인인가?를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좌익의 준동속에 남북 요인회담을 김일성에게 제안하다
김구와 김규식의 반대로 총선거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남로당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전국에서 유엔위원단 반대, 남조선 단정 반대, 미소 양군 동시철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 반동분자 타도 등 구호를 외치며 극렬 폭력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는 1948년 2월 10일 성명을 발표합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않겠다." - 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170page
이렇게 한술 더 뜨는 성명을 발표하고 1948년 2월 16일 김구와 김규식은 비밀리에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 요인회담을 제의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다음 스토리를 보고 싶다면 김구는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어떻게 이용당했나? 2 - 회담 참석 및 농락을 참조하시고 빨간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