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이승만의 정읍발언, 남북분단의 원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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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정읍발언, 남북분단의 원인인가?

by 개인주의자 2024. 2. 24.

1992년 소련이 붕괴되었습니다. 그 후 소련에서 러시아로 승계가 되고 당시 러시아와 한국은 수교를 맺고 차관을 빌려주고 또 교역을 시작하면서 러시아는 한국에게 1945년 해방 당시부터 한국과 관련된 소련의 기밀문서들을 공개하여 줬습니다. 그 문서에서 스탈린이 1945년 9월 38도선 이북에 소련의 위성정권을 세울 것에 대한 지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전까지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분단을 촉발시킨 발언이라고 오해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기밀문서가 공개되어 오해가 풀린 뒤에도 좌파들은 계속 혹세무민 하고 있습니다.

 

 

 

정읍발언은 이승만대통령이 미 군정기에 삼남지방을 순회하던 중 정읍에서 연설하며 발언한 내용입니다. 그 발언의 위딩을 살펴보면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거나 여의치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도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김용삼 - 이승만의 네이션 빌딩 137page

 

위 발언 내용을 보면 남한만의 어떤 정부형태를 만듦과 동시에 통일기관을 자신의 귀경 후 즉시 설치한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통일을 배제했다면 통일기관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 발언에 대해 미국에서 이승만을 보좌했던 허정은

 

정읍발언이 통일정부라는 이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먼저 남한에 민주국가를 건설한 후에 남북 통일정부를 이루려는 현실적 관점에서 단독정부론을 제기했다고 설명했다.

김용삼 - 이승만의 네이션 빌딩 137page

 

그렇다면 왜 이승만은 정읍에서 이런 발언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당시 이승만을 둘러싸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 대해 북한, 남한, 미국 이렇게 세 부분으로 분리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북한상황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

1945년 9월 20일, 한반도가 일본으로 부터 해방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스탈린은 당시 북한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군정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립니다. 이는 소련의 기밀문서에서 밝혀졌습니다. 이후 북한에서는 공산 단독정권 수립을 위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소련이 북한을 건국한 과정에 대해 더 깊게 알고 싶다면 북한, 김일성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을 참조하시길 바라며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글로 넘어갑니다.

 

 

 

정부수립절차의 첫번째로 임시인민위원회 설치

소련군정은 정부수립절차의 첫 번째 단계로 임시인민위원회를 설치합니다. 임시가 붙은 것은 분단을 영속화한다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붙인 것일 뿐입니다. 47년에 드디어 임시라는 간판을 내려버립니다. 임시인민위원회 발족과 동시에 10개 부처로 된 정부조직과 공안기관을 설치하고 토지개혁과 중앙은행 설립 및 화폐개혁, 주요 산업체의 국유화가 실시되어 사실상 정부가 들어선 것과 같은 일을 합니다.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 깊게 알고 싶으면 김일성의 토지개혁과 이승만의 토지개혁을 참조하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글로 넘어갑니다.

 

미국상황

미국은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해 잘 몰랐다

미국은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종전된 후 세계유일 패권국으로 등장하면서 패권질서를 확립해 나갑니다. 이때 경제관련 질서뿐 아니라 국제연합(UN)을 설립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의 정책이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과도 우호적인 통상 교류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좌우합작을 종용하고 심지어 공작까지 펼치다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에 대해 이해가 깊었던 이승만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좌우합작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승만에게 좌우합작에 참여할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좌우합작을 거부하고 심지어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론을 설파한 이승만을 내쫓고 여운형과 김규식과 같은 중도파 인물로 교체하려고 했으며 심지어 그 두 사람을 앞세워 좌우합작에 돌입하기도 합니다.

 

트루먼 독트린으로 정세가 바뀌다

그렇게 소련과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었던 미국이 1947년 3월 12일에 트루먼 대통령이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에 의해 그 기조가 180도 바뀝니다. 미국정부가 소련이 점령했던 지역에는 자유, 민주주의, 자주독립의 싹이 잘리고 소련과 똑같은 공산주의 일색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우호정책에서 대결 및 봉쇄정책으로 바꾼 것입니다.

 

미군정의 하지장군과 이승만

 

 

남한상황

공산주의의 천국

당시 한국인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경험조차 못해봤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소련의 코민테른에 의해 우리의 독립군과 국내에 공산주의가 손을 뻗치기 시작했고 따라서 당시 한국인들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가 가장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 또한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지식과 경험이 전무했었습니다.

 

미군정의 여론조사 결과

그 당시 미군정은 한국인들을 상대로 대규모 여론조사를 실시하는데 질문은 당신은 어떤 체제를 선호하는가? 였고 보기와 결과가

 

1. 사회주의 - 71%

2. 자본주의 - 14%

3. 공산주의 - 7%

4. 모르겠다 - 8%

 

였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같은 것으로 본다면 무려 78%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 생각 없이 지지부진하게 대처했다가는 남한도 공산주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좌우합작의 본질은 공산화

소련은 자신이 점령한 곳에서는 항상 좌우합작을 떠들었습니다. 즉 좌우가 모여 함께 다양성을 인정하며 나라를 건국하자! 뭐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좌우합작을 외쳤던 곳에서는 어김없이 암살, 실종, 의문사 등으로 우익이 사라지고 좌익들 중에서도 민족주의 좌익도 사라지고 결국 소련의 말을 듣는 소련파만 살아남아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습니다.

 

좌우합작 인사들

 

 

대표적인 것이 중국의 국공합작

중국 공산당은 자신을 때려잡는 국민당을 상대로 국공합작을 하여 먼저 일본군을 물리치자고 합니다. 그래놓고 실제로 공산당은 일본과의 전쟁은 거의 뒷전이고 일본군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는 국민당을 상대로 여러 공작을 펼쳐 결국 국민당이 패망하는 길로 몰았습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1964년 7월 9일 아시아경제심포지엄에서 미나미고 사부로라는 일본 자본가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하다고 말하자

 

"아니다! 일본이 대규모로 침략전쟁을 일으켜 중국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다면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게 전쟁배상요구나 사과요구 한번 하지도 않았습니다.

 

지도자의 자질이 중요하다

한 간에 김구와 이승만을 비교하며 김구가 더 뛰어난 인물인 것처럼 말하는데 사실 이승만과 김구는 그야말로 게임이 안 되는 상대입니다.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해서 보고 싶다면 인물비교 이승만 VS 김구 - 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야 했는가?를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글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