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글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나라 말아먹기 4에서 고종과 민비(명성황후)가 무속과 미신에 미처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용하다는 무당들이 총애를 받고 득세하게 됩니다. 오늘 글은 그 꼬락서니에 대해 쓰고자 합니다.
민비(명성황후), 용한 무당을 만나다
월급을 13개월이나 밀린 후 겨우 한달치 월급을 받은 구식군인들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월급으로 받은 쌀 포대자루를 열자마자 두 눈을 의심했습니다. 포대자루 안에 반은 모래에 그나마 있는 쌀은 썩은 쌀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구식군인들은 눈이 뒤집혔고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임오군란이었습니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자신들의 월급을 담당하고 있는 선혜청의 책임자였던 민겸호를 죽이고 궁궐로 쳐 들어가 민비(명성황후)까지 죽이려 했습니다. 이때 민비(명성황후)는 홍계훈의 도움으로 궁에서 빠져나와 사촌오빠 민응식이 살고 있는 충청도 장호원으로 내려가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장호원에서 온갖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올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시달리던 민비(명성황후)는 학질에 시달리게 될 정도로 몸이 쇠약해 졌으나 차차 이겨내고 회복되던 중 근처에 사는 무당이 민비(명성황후)가 장호원에 와있다는 소문을 듣고 민비(명성황후)를 찾아옵니다.
민비(명성황후)에게 찾아온 무당은 자신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있는 민비(명성황후)를 향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합니다.
감히 왕비마마를 배알한 연유는 환궁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니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 배상열, 조선을 홀린 무당 진령군 97page
민비(명성황후), 다시 환궁하다
민비(명성황후)는 그 무당의 말대로 실제로 환궁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당이 점쳐준 환궁날짜에 정확히 환궁을 하게 되자 민비(명성황후)는 그 무당을 완전히 믿게되고 마침내 진령군이라는 시호를 내리게 됩니다.
진령군은 누구인가?
진령군의 본명은 박창렬이었고 여성이었습니다. 나이는 40대가 넘은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원래 시호는 벼슬을 했거나 왕족에게 내리는 것으로서 남녀차별이 심했던 조선에서 여성에게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무당은 조선시대 내내 천민취급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시호를 내린다는 것은 정말 예외 중에 예외인 것입니다.
진령군은 어떻게 민비(명성황후)를 홀렸는가?
민비(명성황후)는 진령군을 철썩같이 믿고 의지했기 때문에 황현의 오하기문에 의하면 심지어 언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따라서 진령군이 말하는 것은 다 들어줬습니다.
1. 관우를 들먹거리다
어느날 진령군은 자신을 관우의 딸이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무당이 "나는 관우의 딸이니 신당을 지어 정성껏 받들라"라고 주술 했다. 무당은 궁궐가까이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면 관우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고 현혹했다. 민비(명성황후)는 노론의 거두 송시열 집터에 북관왕묘라는 사당을 지어주었다. - 김용삼,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 158page
이 북관왕묘의 규모는 현재 서울에 있는 동묘와 비슷한 규모입니다. 그래서 이 거대한 공사를 하기 위해 많은 혈세가 들었을 것이며 백성들이 중노동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2. 약점을 잡고 현혹하다
저번 포스팅에서 금강산 1만2천봉에 봉우리마다 쌀과 비단 그리고 돈 1000냥씩 바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500석의 백미로 밥을지어 한강에 뿌렸다고 했습니다. 그것들은 전부 병약했던 왕자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주술을 한 인간이 바로 진령군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면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나라 말아 먹기 4 - 무속과 미신에 미치다를 참조하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넘어갑니다.
또 저번 포스팅에서 굿판을 벌이며 춤추다가 저승에 있는 영혼과 접신하면서 태조 이성계와 접신하는 척을 하며 고종과 민비(명성황후)를 현혹했습니다. 이 또한 진령군의 작품입니다.
국사에 관여하다
진령군이 이토록 총애를 얻자 진령군이 기거한 사당인 북관왕묘에는 진령군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어차피 관직도 매관매직하는 판에 진령군에게 줄 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또 진령군은 김창렬이라는 수양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이 김창렬이 사실 수양아들이 아니고 불륜 남이라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이처럼 진령군은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머리 꼭데기에 앉아 두 사람을 쥐고 흔들며 현혹했습니다.
진령군의 최후
진령군의 이런 작태에 제대로된 선비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안효제 등이 진령군을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과 민비(명성황후)는 오히려 상소를 올린 자들을 귀향을 보내버렸습니다. 심지어 갑신정변 때 고종과 민비(명성황후)는 공포로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채로 진령군이 살고 있는 북관왕묘를 찾았습니다. 이로 인해 진령군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 머리위에 앉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진령군은 갑오개혁 때 사형선고를 받고 목이 잘려 최후를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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