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조선왕조 쇠망사 9 - 사림이 만들어간 조선사회 2 (가난한 나라)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선왕조 쇠망사 9 - 사림이 만들어간 조선사회 2 (가난한 나라)

by 개인주의자 2024. 11. 30.

조선시대 붕당정치사를 보면 정말 끊임없이 대립하고 갈등하고 분열되었습니다. 그래서 노론, 소론,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 수많은 붕당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조선 초기에 나타난 사림파의 후예들입니다. 그래서 조선왕조가 멸망하기 직전에 있었던 세도정치를 대표하는 풍양조씨, 안동김씨도 전부 사림의 후예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을 모두 사림이라는 단어로 지칭하고자 합니다. 이 사림들이 훈구파가 몰락한 명종이후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 사림의 후예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이끌어갔던 것입니다. 이번 포스팅은 조선이 왜 극도로 가난해졌는지에 대해 쓰고자 합니다.

 

 

조선은 왜 가난해졌는가?

한반도에 존재했던 우리역사에 속해있는 과거의 나라들 중에 조선만큼 가난했던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선도 처음부터 가난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중간에 어떤 이유때문에 가난해졌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번째가 유교적 이상국가 건설입니다. 사림파들은 세종과 문종의 노력으로 주자성리학이 조선사회에 체화되면서 나타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자성리학을 마음속 깊이 체화했고 자신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주자성리학을 체화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자성리학 근본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당연히 유교적 이상국가를 조선에 실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향이지 현실에서는 불가능 했던 것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인해 결국 조선은 매우 가난한 국가가 되어버렸습니다.

 

두번째가 전란이었습니다. 조선은 건국된지 200년만에 큰 전란을 겪었습니다. 바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입니다. 두 전란 모두 일본이 침략한 것입니다. 전란의 기간도 7년이나 되어 전 국토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이때문에 안그래도 가난해진 조선은 더 가난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전란 이후에도 조선왕조는 250년 이상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멸망할 때 까지 임진왜란 이전의 생산성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생산성은 더 악화되었고 1910년 조선이 멸망할 때에는 말그대로 껍데기만 남은 나라였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도 바로 조선을 좌지우지했던 조선의 지배층인 사림들 때문이었습니다.

 

세번째가 천재지변 때문입니다. 조선시대때는 전 지구적으로 소 빙하기가 오는 등 천재지변이 있었습니다. 이는 물론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조선시대만 특히 자연재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재해를 잘 대비한다면 얼마든지 그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제 이 세가지 이유중에 유교적 이상국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유교적 이상국가 건설이란 무엇인가

1) 안빈낙도 강요

조선을 가난하게 만든 유교의 사상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절약과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절약과 검소함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의 통치이념이 되어 종교화되면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조선사회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가르쳐 지는 것을 넘어 강요되었던 것이 바로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사자성어였습니다. 그렇다면 안빈낙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을 보자면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 - 네이버 국어사전

 

이것은 지금은 비록 가난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기에 찬란해질 미래를 꿈꾸며 현재의 가난한 생활을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견디라는 것이 아니고 그저 언제 벗어날지 모르는 아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빈궁함을 편안하게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이 안빈낙도의 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명심보감 존심편(마음을 보존하라)

心安(심안)이면 茅屋穩(모옥온)이요 性定(성정)이면 菜羹香(채갱향)이니라.
(마음이 편안하면 띠 풀로 엮은 초가집도 아늑하고, 성품이 안정되면 나물로 끓인 국도 향기롭다.)

헤드라인 뉴스, 자공을 꾸짓는 원헌의 안빈낙도

 

이 기사에서 공자의 제자 중 가장 큰 부자였던 자공과 매우 가난했던 원헌의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장자에 있는 이야기로 안빈낙도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 인용하겠습니다.

 

원헌은 집이 가난해 겨우 발을 뻗을 정도밖에 안 되는 오두막집에서 살았다. 그의 집은 띠풀을 엮어 지붕을 얹었고, 잡초를 얼기설기 얽어 문을 짰고, 뽕나무 가지를 휘어 문을 여닫았을 정도로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다.

그런데 원헌은 이렇게 작고 초라한 집에 살면서도 항상 편안한 마음을 유지한 채 정좌를 하고 거문고를 타며 즐거움을 누리며 살았다. 비록 먹을 것이라곤 거친 밥과 나물 반찬밖에 없었지만 이 또한 크게 만족하며 살았다.

자공은 공자의 제자 중 최고의 부자였다. 어느 날 자공은 아름답게 치장한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훌륭하게 꾸민 옷을 입고 원헌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자공이 타고 온 마차가 좁다란 골목보다 더 컸던 까닭에 원헌의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에 자공은 마차에서 내린 다음 원헌의 집으로 걸어갔다. 자신을 찾아온 자공의 모습을 발견한 원헌은 너무나 기쁜 마음에 신발을 발에 걸친 채 질질 끌면서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마중 나갔다.

그런데 원헌을 본 자공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면서 “정말로 심하게 병들고 쇠약해졌군요”라고 말했다. 자공의 탄식을 들은 원헌은 순간 자공이 부귀영화에 푹 빠져 지내느라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선비의 삶을 단지 비참하고 누추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이렇게 말한다.

“아무런 재물도 없는 사람을 가리켜 가난하다고 말하고, 배우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병들었다고 말하네. 지금 나는 가난하지만 병든 사람은 아니네.” 원헌은 자공에게 ‘나는 가난하지만 병든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자네는 부귀하지만 병든 사람이다’며 힐책한 것이다. 일찍이 10대 제자를 언급하면서 공자가 언변이 뛰어나다고 평가했던 자공은 그 즉시 원헌의 말에 담긴 따끔한 훈계를 알아챘다. 그럼 자공은 자신을 크게 꾸짖은 원헌의 말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자공은 부귀와 권력을 모두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공자의 제자답게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헤드라인 뉴스, 자공을 꾸짓는 원헌의 안빈낙도

 

그런데 이들이 단순히 주자성리학 근본주의자라서 백성들에게 안빈낙도를 강요했을까요? 만약 이유가 그것 뿐이라면 그나마 이들은 매우 순진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사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공을 꾸짖은 원헌의 안빈낙도

 

2)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한 도구

 

조선시대 지배층을 보면 현재 북한이나 필리핀같은 나라들의 지배층이 떠오르는 것은 저뿐일까요? 만약 지배층도 안빈낙도를 솔선수범하고 있었다면 정말 이것이 세상의 진리인줄 알고 순수하게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자기들은 세상에 없을 부자로 살면서 백성들에게만 안빈낙도를 강요했다면 이는 매우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안빈낙도를 노래하는 짧은 시를 보겠습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 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유성운, 사림, 조선의 586, 186page

 

이 시는 유성운 작가가 조선 중기에 살었던 송순이라는 사람의 시를 자신의 책에 인용한 것입니다. 이 시에서 초려삼간이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최소한의 크기라고 생각한 것으로서 가난함의 대명사 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지은 송순이라는 사람은 경상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지낸 당시 정계의 거물이었으며 그가 80세에 자녀 8남매에게 재산을 분배한 분재기에 따르면 노비가 160구, 전답이 700여 마지기나 된 재산을 갖고있었습니다.

 

한 마지기는 150~300평 정도로서 200평으로 계산하면 땅만 140,000평을 갖고있던 큰 부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초려삼간 운운하며 안빈낙도를 노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위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북한지배층도 온갖 사치를 다 하면서 인민들은 굶어죽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 백성을 가난하게 하는 것이 통치를 쉽게하는 것인지 그리고 현대북한은 조선과 어떻게 똑같은지 알고싶다면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왜 실패했는가?를 참조하시고 빨간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3) 무본억말의 나라 조선

여러분은 조선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사농공상', '무본억말'이란 사자성어가 떠오릅니다. 이는 모두 농업을 중요시하고 상공업을 천하게 여긴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왜 상공업을 그토록 천하게 여겼을까요?

 

먼저 유교사상과 유교사상 중 하나인 주자성리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유교사상은 춘추전국시대 때 살았던 공자가 정립한 사상입니다. 공자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당시 상황에 대한 해법으로 유교사상을 설파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상이 오랜시간 후 조선에 와서 근본주의 사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공자는 당시의 혼란을 없애기 위해 각자 본분을 지킬 것을 강조했고 욕심을 자제할 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을 주자성리학도 똑같이 이어받았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지배층인 사림들은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마저 욕심으로 간주해버렸습니다. 상공업은 유학자들에게 욕심이 가득한 사람들로 인식되었고 그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말단인 상공업이 왕성해지면 근본인 농업이 축소되는 것입니다. 말단인 상공업에 종사하면 백성들은 간사해지고 근본인 농업에 종사하면 백성들은 정성스러워집니다. 백성들이 정성스러우면 재물의 사용이 골고루 풍족해지고, 백성들이 자기 이득만을 중시하고 사치스러워지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유성운, 사림, 조선의 586, 193page

 

위의 인용문은 유성운작가가 중국 한 무제 때 유명한 논쟁이 염철론의 일부를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생각하는 당시 조선의 지배층들은 어떻게 살았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많은 노비들을 소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작농들이 힘들게 농사지은 소출을 70%나 받아가며 평생 놀고먹었던 자들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백성들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대규모 토지를 갖고있던 사대부에게 매여 충성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계층이동의 사다리도 없던 것입니다. 이랬던 백성들이 자신의 토지를 갖게되거나 토지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상공업에 종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들의 지배력이 약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승만대통령이 시행했던 토지개혁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승만의 토지개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4 - 경제정책의 국내적 기초 2 - 토지개혁과 사유재산제 확립을 참조하시고 빨간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이승만의 토지개혁의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