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우리나라에서 제철소 하면 제일먼저 포항제철(포스코)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저도 그랬지만 포항제철이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제철소라고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항제철이 최초의 제철소가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만 중화학 공업을 생각하고 꿈꿨는 줄 알았는데 이승만 대통령 또한 그랬다는 것을 알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부분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시리즈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2 -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 경제 사상의 기초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3 - 경제정책의 국내적 기초 1 - 교육 혁명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4 - 경제정책의 국내적 기초 2 - 토지개혁과 사유재산제 확립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5 - 경제정책의 국내적 기초 3 - 법과 제도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6 - 경제정책의 국외적 기초 - 미국패권질서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7 - 산림 녹화와 에너지 정책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9 - 국가적 경제개발계획의 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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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
1) 이승만은 제철소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이승만 대통령은 제철소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당연히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처럼 이승만 대통령도 산업화를 위해서는 철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산업화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승만은 산업문명의 핵심이 철강공업에 있으며 철강이 '산업의 쌀'이라는 사실을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과정에서 깨달았다. - 김용삼,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 211page
2) 이승만 정부, 제철소 건립 프로젝트를 가동시키다
이에따라 1953년 4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부산에 피난와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제철소 건립을 계획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하루 빨리 부흥 사업을 펼쳐야 할 것이니 그 기초가 되는 철강 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 특히 주택건설사업을 위한 함석, 철판 등의 공급을 담당할 제강사업 건설계획을 우선적으로 강력히 추진하라
김용삼,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 211page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전후 복구와 산업화를 이미 머리속에 그려넣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명령에 다라 관련부서는 인천에 '대한 중공업 공사'를 국영으로 발족시켰습니다.
3) 제철소 건립의 어려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우리가 자금이 풍부했던 것도 아니었고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제철소를 짓는다는 것은 말그대로 '맨 땅에 헤딩하는 것'보다 더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철소를 짓는데 필요한 자금과 기술은 어떻게 마련했을까요?
- 건립 자금 조달
또 당시는 전쟁으로 완전히 피폐해진 상황이라 나라에서 생산활동이 거의 중지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라 재정의 거의 대부분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을 때라 미국의 입김이 매우 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제철소 건설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미국이 제철소 건립을 반대한 논리는 이것이었습니다.
미국 원조당국은 "지금 수백만의 피난민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무슨 철강공장인가. 시급한 민생문제부터 해결하라"면서 우리 측 요구를 거절했다. - 김용삼,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 212page
이부분에 대해 미국을 비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얼마나 우리 상황이 비참했고 희망이 없어 보였으면 그랬을까하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현재 우리가 발전한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은 당시에는 정말 꿈도 못꾸던 그리고 아무도 몰랐던 정책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미국의 거절은 당연했다고 봅니다.
이렇게 미국이 거절하자 외화가 부족해 어려운 상황임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내각에 정부가 자체 보유한 달러로 제철소를 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따라 내각은 140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제철소 건설 기술의 획득
제철소를 건설하는데는 자금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기술은 어떻게 가져왔을까요? 기술을 얻기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부상자 치료를 위해 와 있던 서독 적십자 병원장이었던 후버박사에게 부탁했습니다.
후버박사는 우리의 제철소 건설 계획을 서독정부에 알렸고 서독정부는 아이젠버그라는 유대인 중개상을 대표로 해서 한국 제철소 수주전에 뛰어들었습니다. 국제입찰방식이었고 서독외에 미국과 스위스가 경합을 벌였으나 서독으로 선택되어 드디어 제철소가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4) 철강산업의 인재를 키우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철소 건설 수주를 따낸 서독과 협의를 하여 학생들을 서독으로 유학시켜 인재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이승만 대통령은 서독으로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김재관이 당시 국비 유학생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왔는데,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선발된 유학생들을 경무대로 불러 일일이 장학증서를 주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오너라. 우리가 참다운 독립국가가 되려면 제철공장이 있어야 돼. 여러분들이 그걸 해 내야 한다"며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고 한다.
김용삼,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 214page
놀라운 것은 김용삼 기자에 의하면 이때 서독으로 공부하러 갔던 분들이 박정희 정부에서 추진했던 포항제철을 건설하는데도 많은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포항제철을 건설할 당시 기술자문을 해주는 외국기업들은 이미 한물간 낡은 기술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고 그 낡은 기술을 채택했다면 포항제철은 지금과 같은 성공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 때 서독으로 유학갔다온 인재들이 구식기술임을 간파했고 속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한중공업공사는 인천중공업으로 변경된 후 정부지분이 전부 매각되어 민간기업으로 바꼈다가 여러 민간기업으로 인수되고 합병되는 과정을 거쳐 1978년 현대그룹에 인수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현대자동차그룹에 소속되어 현대제철이라는 상호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공업화 정책
이승만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는 농업경쟁력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1) 왜 농업경쟁력이 없을까?
우리나라의 지리적, 기후적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남한)의 면적은 대략 10만 제곱킬로미터 입니다. 사실 박정희 정부 이후 간척사업을 많이 해서 약간 늘어난 수치입니다. 땅 자체가 좁기도 하지만 그 좁은 땅 중에서도 산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70%나 됩니다. 토질은 화강암이 기반되어 있기 때문에 물은 맑으나 농사짓기에는 매우 척박합니다.
기후적으로 보면 우리는 1년에 2모작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쌀농사는 물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 많은 물을 충당할 수 있을 만큼의 강수량은 있지만 그 강수량의 대부분이 이른바 '장마철'이라고 하는 짧은 기간에 거의 다 내리기 때문에 장마철에 내린 비를 저장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땅에서 농업은 경쟁력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2) 외국에서는 농업부터 시작하라고 권유
여러분 혹시 '네이산 보고서'를 아십니까? 네이산 보고서는 외국에서 우리에게 처음으로 산업정책을 자문해준 보고서 였습니다. 이 네이산 보고서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요?
1950년 12월 유엔총회는 한국경제 부흥을 위해 유엔한국재건단(UNKRA)을 결성하고 1951년 7월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중략
1952년 전선이 휴전선 부근으로 교착되자 운크라는 전후 한국 경제의 재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네이산협회를 운영하고 있던 로버트 네이산에게 연구용역을 맡겼다. 네이산협회는 1952년 12월 '한국경제 재건계획'이란 예비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네이산 보고서'였다. - 김용삼, 이승만과 기업과 시대, 208~209page
즉 네이산 보고서는 한국경제재건을 위해 만들어진 유엔직속기관에서 네이산협회에 연구용역을 맡겨 발간된 연구보고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네이산 보고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네이산 보고서의 핵심은 '한국은 쌀 품종을 개량해 생산량을 늘려 농업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한국은 우선 농업에 집중 투자하여 농업부문의 생산성을 높이고, 증산된 쌀을 해외에 수출해서 얻은 외화로 긴급물자를 조달하는 방식으로 공업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김용삼, 이승만과 기업과 시대, 209page
저는 이 내용을 읽으면서 네이산 보고서를 작성한 네이산 협회 연구원들이 한국에 직접 와 봤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만약 한국에 직접와서 보고 연구했다면 이런 말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쌀 수출을 하려면 우리 국민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잉여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쌀이 남아돈다고 합니다. 쌀이 남아도는 이유는 여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네이산 보고서의 말대로 우리는 벼의 품종도 개량했고 간척사업을 해서 농지도 늘리고 농업기술도 발전시켜 생산량을 크게 늘렸습니다. 그러면 단순히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서 쌀이 남아돌까요?
그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경제가 발전하면서 밥 말고도 먹을 것이 너무 풍부해 졌다는 것입니다. 즉 경제발전으로 인한 소득증가가 쌀이 남아도는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말입니다.
박정희 정부시절 품종을 개량해서 통일벼라는 품종이 나왔습니다. 맛은 조금 없었지만 생산량이 크게 늘어 우리는 보릿고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즉 수출할 정도로 남아돈 것이 아니라 식량부족만 해결했을 뿐 이었습니다.
3) 네이산 보고서에 대한 우리 정부의 반응
네이산 보고서가 발간되어 우리정부에 제출되자 우리정부요인들은 보고서의 내용에 전부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실제 정부요인들의 증언을 보겠습니다.
네이산 보고서에 대해 이승만 정부 때 한국은행 총재와 부흥부 장관을 역임한 송인상은 네이산 보고서는 여러 각도에서 논란이 되었지만 나는 반봉건적인 영세농업구조 관련, 농업 중심의 투자계획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을 여러차례 전달했다. 그러나 네이산씨는 자본의 축적정도나 기술수준, 경영능력에 비추어 볼 때 한국경제의 공업화를 지금 시작하는 것은 부적당 하다고 고집을 부렸다.
중략
이승만 정부에서 송인상의 후임으로 부흥부 장관을 지낸 신현확은 "그 시절 대부분의 정부 관료들은 우리나라가 산업화로 나가야 한다는 점을 확고아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용삼,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 210page
이 때문에 네이산 보고서는 채택되지 못하고 사문화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