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어떤 행동을 직접하기전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생각을 먼저합니다. 즉 생각이 없으면 행동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개의 행동을 유발하는 생각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사상으로 부터 출발합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이 했던 여러 경제정책, 경제발전의 기초가 되는 정책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의 사상적 기초를 먼저 알아봐야 합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승만이라는 사람의 사상적 기초를 조명하고자 합니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시리즈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3 - 경제정책의 국내적 기초 1 - 교육 혁명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4 - 경제정책의 국내적 기초 2 - 토지개혁과 사유재산제 확립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5 - 경제정책의 국내적 기초 3 - 법과 제도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6 - 경제정책의 국외적 기초 - 미국패권질서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7 - 산림 녹화와 에너지 정책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8 - 제철소 건설과 공업화 정책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9 - 국가적 경제개발계획의 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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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원래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승만은 조선말기에 태어난 전주 이씨 왕족으로서 양녕대군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어릴때는 과거급제를 위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시 과거시험은 돈을 받고 파는 것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돈을 내지 않은 이승만은 여러번 낙방했습니다.
당시 과거시험의 매매와 매관매직의 실상을 알고 싶다면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나라 말아 먹기 1 - 매관매직을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넘어갑니다.
여러번 낙방해서 절망하고 있을 무렵 일어났던 청일전쟁(1894년)의 충격과 친구 신긍우의 권유로 1895년 서양식 교육을 하고 있던 배재학당에 입학했습니다. 김용삼 기자에 따르면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처음 갔을 때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갔다고 합니다.
배재학당은 어떤 곳이었을까?
배재학당은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서울 정동에 1885년에 세운 서양식 신식 학교였습니다. 당시 배재학당의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유영익 교수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배재학당은 청년 이승만에게 서양문명에 눈 뜨게 만들어준 별천지였다. 이 학당은 한국, 유럽, 미국, 일본, 중국 학생들이 두루 섞여 배우는 국제적 분위기의 학교였다. -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 비전, 19~20page
또한 배재학당의 강사진들은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엘리트 선교사들로 이루어진 매우 훌륭한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이 한학과 과거급제 밖에 몰랐던 꼰대 이승만을 세계적인 선구자이자 지도자로 바꿔놓은 곳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이곳에서 동양을 넘어 세계의 여러나라의 역사, 지리 등을 익히고 또 자신이 몰랐던 정치사상을 배우면서 인권과 자유민주주의를 배웠습니다. 뿐만아니라 경제와 무역을 배웠고 그동안 알지못했던 수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청년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대한제국의 군졸에게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됩니다.
한성감옥에 투옥된 이승만
이승만은 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을까요? 유영익 교수에 따르면
그가 투옥된 간접적 이유는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등 자신이 직접 창간하거나 투고한 신문들을 통해 고종황제의 보수 정권을 신랄히 비판함과 동시에 독립협회 산하 만민공동회 총대위원으로서 과격한 반정부 데모를 여러 번 조직하고 선동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투옥된 직접적 이유는 입헌군주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급진적 정치 개혁 운동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 비전, 24page
저는 위의 인용문을 보면서 당시 청년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배운 것을 조선 땅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열혈청년이었이만 아직 다듬어지지않은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존재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투옥되어 5년 7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이승만의 기독교로의 회심
이렇게 투옥된 이승만은 투옥된지 21일 후인 1899년 1월 30일 탈옥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만에 잡혀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이 탈옥으로 이승만은 사형을 간신히 면한 태 일 일백 및 종신징역이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이승만의 투옥생활은 매우 혹독했는데 김용삼 기자의 책에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서소문 근처의 한성감옥에 수감된 이승만은 무게 10kg이나 나가는 형틀을 목에 달고 두 손은 수갑에 묶이고, 발은 형틀에 끼워진 채 7개월을 지냈다. - 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 빌딩, 33page
한마디로 꼼짝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이호 목사의 강연에 따르면 성경을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성경을 못넘기니 한 페이지를 다 보면 옆 사람보고 한장만 넘겨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며 이승만은 드디어 회심하게 됩니다. 유영익 교수의 책에 이승만의 회심장면이 쓰여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너를 용서하실 것이다" 라는 배재학당 시절 예배실에서 들었던 설교를 기억했다. 그 순간 그는 어깨에 얹힌 칼에 머리를 얹고 "오 하나님! 내 영혼과 내 나라를 구해주옵소서"라며 간절히 기도했다. 이 짤막한 기도를 계기로 , 유가에서 태어나 독실한 불교도인 어머니 품에서 자라난 이승만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 비전, 27page
독립정신의 저술
기독교로 회심한 이승만은 드디어 그를 꼼짝도 못하게 했던 형틀과 각종 수갑을 밧게되고 감옥안에서 한결 자유로워진 몸으로 수많은 저술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안에서 영어사전도 집필하고 수많은 논설을 써서 제국신문에 실었습니다. 또한 국제법인 만국공법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수많은 글들 중에 가장 독보적인 것이 바로 '독립정신'이라는 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독립정신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용을 봤을 때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출판할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 따라서 감옥동기였던 박용만 선생이 미국으로 가져가 출판한 책이었습니다.
이 독립정신의 내용 그대로 현재 대한민국이 건설되어 있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이 독립정신이라는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독립주의의 긴요한 조목 - 실천 6대 강령'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전에 이 6대 강령에 대해 쓴 글을 링크해 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독립정신에 나타난 이승만의 건국이념 1 - 통상, 신학문, 외교
독립정신에 나타난 이승만의 건국이념 2 - 주권, 의리, 자유와 권리
독립정신 실천 6대강령을 알고 싶은 분들은 위 두 글을 참조하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