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조선왕조 쇠망사 6-2 - 세종의 개혁 : 유교(주자성리학)적인 나라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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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쇠망사 6-2 - 세종의 개혁 : 유교(주자성리학)적인 나라 만들기

by 개인주의자 2024. 11. 21.

조선이 멸망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여전히 유교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유교적인 것들이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부분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원래 유교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현재 한국인들은 나이로 위 아래를 따지고 아직도 많은 가정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제사의 일종인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갑니다. 그리고 여전히 족보가 있고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얼마 전까지 남존여비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성들은 교육받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베이비부머 세대에서는 그랬습니다. 물론 집이 가난한데 반해 자녀들이 보통 5~6명 정도 되니 형편상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겠지만 대부분 선택받는 자녀는 아들이었습니다. 반면 딸들은 공장에 나가 일을 했습니다. 사실 저희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래 이런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유학사상은 우리로 따지면 고조선시대와 동시대인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공자에 의해 정립되었지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유학사상은 단순히 여러 사상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 이전에 있었던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는 불교가 국교였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가 불교사상보다 유교사상을 더 따르게 되었을까요? 바로 세종이 나라를 완전히 뒤집어엎겠다는 일념으로 개혁을 집요하게 실행했던 때부터였습니다.

 

대체 왜 세종은 유교사상을 강요했는가?

세종은 자신이 재위하는 동안에 나라를 바꿔놓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에 따라 정말 집요하게 두 가지를 실행했는데 첫 번째가 강남농법의 정착이었고 두 번째가 유교사상을 조선사회에 완전히 뿌리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강남농법에 대해서는 바로 전 포스팅에서 설명드렸으니 참고 바랍니다.

 

세종은 왜 조선사회에 유교사상을 뿌리내리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조선이 건국된 이유와 관련 있습니다.

 

제가 일전에 쓴 조선왕조 쇠망사 2 - 조선을 건국한 세력은 누구인가? 에서 고려시대 말기에 나타나서 조선의 지배층이 되는 신진사대부가 조선을 건국한 이유가 고려의 왕들이 강남농법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을 했으나 실패하는 것을 보고 고려를 갈아엎고 새 왕조를 세워서 주자성리학을 체화해야 강남농법의 정착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강남농법을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강남농법이 개발되어 크게 적용시킨 남송시대를 주름잡던 주자성리학 사상을 배우고 무장하여 완전히 체화해야 한다는 것이 세종과 신진사대부들의 논리였던 것이고 이것을 세종이 그대로 실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조선사회를 바꾸기 위해 무슨 노력을 했는가?

현시대를 사는 우리들도 여전히 조선시대 때의 사상을 여러 부분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통신과 언론이 발전한 이 시대에도 그러한데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을 때는 어땠을까요? 사상이 문제가 아니라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었다는 것도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한 100년은 지나야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교체가 되었다는 것을 전국적으로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1000년이 넘도록 내려왔던 불교와 불교사상을 뒤엎으려면 보통노력으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노력을 했을까요?

1) 숭유억불 정책

사실 숭유억불 정책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부터 시행됐던 정책입니다. 그러나 세종 때에 이르러 더 급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사실 유교사상이 조선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그동안 사회를 지배해 왔던 불교를 박멸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했을까요.

 

전통 종교였던 불교를 뿌리 뽑기 위하여 불교식 전례를 전면금지하고 불교 사찰을 폐쇄하고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친영(親迎)을 강요하고 사당을 짓게 하여 주자성리학의 관혼상제를 뿌리내리게 한다. 

-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 1권 143page

 

우리는 학교에서 석굴암에 습기가 차는데 그 이유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석굴암을 망쳐서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때 숭유억불 정책으로 석굴암이 50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고 그것을 나름 수리한 게 바로 일본이었던 것입니다.

 

500년간 방치되어 있던 석굴암

 

2) 주자성리학적 생활 강요

우리가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을 어떻게 놓는지를 떠올릴 때 '홍동백서'나 '어동육서' 같은 단어가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주자성리학을 만든 주자가 쓴 주자가례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종이전에는 주자가례에 의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친영은 어떻게 하는지, 사당은 왜 필요한지, 위패란 무엇에 쓰는 물건이고 어떻게 만드는지, 제사는 왜 지내는 것이고 제사상은 어떻게 차리는지, 백성은 물론 왕실과 사대부조차 몰랐기에 나라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제정하여 일일이 백성들을 가르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 1권 143page

 

뿐만 아니라 족보나 집성촌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이는 모두 세종이 개혁을 한 이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종법제도를 바탕으로 한 향촌 질서가 자리 잡으면서 조선사람들은 사당을 중심으로 같은 성씨들끼리 모여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기 시작한다. 본(本)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고 부계혈통, 즉 성씨를 중심으로 가족 관계를 추적하는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현존하는 족보 중 가장 오래된 '안동권 씨 성화보'가 만들어진 것은 1476년(성종 7년)이었다.

-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 1권 163page

 

인용문에 따르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 모든 것이 예상외로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품었던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 의문은 제가 속한 성씨는 시조가 고려개국공신이고 그 역사가 약 1000년 정도 됩니다. 그런데 저희 족보를 보면 시조부터 대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쓰여있는데 어떻게 알고 그렇게 상세하게 기록했느냐입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바로 '그냥 막 썼다'라는 것입니다. 한국사람 만들기의 저자인 함재봉 박사의 강연에서 족보가 있기 전에는 조상이름을 알아봐야 증조나 고조까지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별 수 있습니까? 그냥 막 써넣는 것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집성촌이 생기자 자신과 뿌리가 같은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게 되었고 이때 동성동본 혼인이 금지되었습니다.

 

집성촌

 

 

세종의 개혁작업에 대한 총평

저는 오늘 쓴 내용을 책으로 보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제사, 족보 같은 것들이 비교적 최근에 우리 민족 안에 들어왔다는 것에 꽤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세종이전 아니 조선 이전에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마 이 부분은 일본에서 참고가 많이 될 듯합니다.

 

세종은 분명 '애민정신'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정착시키려 애썼던 강남농법은 거의 실패로 돌아갔으나 주자성리학적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은 성공했다고 생각됩니다. 과연 언제쯤 우리는 주자성리학적인 모습을 버리고 그 전의 본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여기까지 조선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 지식정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탑재한 상태로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폐단이 생기더니 급기야 조선이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일본과 여진족에게 탈탈 털리고 나서 폐단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조선사회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쇠망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