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조선왕조 쇠망사 6-1 - 세종의 개혁 : 강남농법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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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쇠망사 6-1 - 세종의 개혁 : 강남농법 정착

by 개인주의자 2024. 11. 19.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면서 불교에서 유교를 숭상하는 나라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매우 더디게 바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4대 왕 세종이 등장했습니다. 세종은 조선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 집요하게 개혁을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 세종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조선인의 의식이 변화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포스팅에서는 세종이 추진했던 개혁과 그 결과를 서술하고자 합니다.

 

 

한국인에게 세종은?

한국인에게 세종은 대왕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이는 광개토대왕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 있어 세종은 반만년 역사를 관통하는 최대의 위인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각 학교에 세종대왕 동상이 항상 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종을 왜 그렇게 대단한 위인으로 생각할까요? 가장 큰 것이 바로 훈민정음 창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가 편리하게 쓰고있는 한글은 훈민정음을 개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가 바로 '애민정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는 단순한 애민정신이 아닙니다.

 

세종이 만들고자 했던 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그렇다면 세종이 하고자 했던 개혁의 목적과 내용이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을 알아야 세종이 했던 훈민정음 창제부터 측우기, 해시계의 개발 등 세종이 했던 일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종이 하고자 했던 개혁은 물질적으로는 '강남농법'을 조선에 들여오는 것이고 정신적으로는 주자성리학을 모든 백성이 체화한 나라였습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강남농법을 정착시키기 위한 세종이 노력과 그 결과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강남농법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강남농법이란 볍씨를 직접뿌리는 것이 아니라 모판에서 약간 성장시켜 물이 고여있는 논에 옮겨 심는 농사방식입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하는 벼농사가 바로 강남농법입니다.

 

조선의 지배층이 강남농법을 알게 된 계기가 바로 고려시대 때 몽골침략에 이어 일본원정으로 기근이 들었을 때 쿠빌라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쿠빌라이가 보내준 쌀이 바로 중국 강남에서 생산된 쌀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처음으로 당시 신진사대부였던 조선지배층이 중국강남과 그 지역의 농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은 분은 조선왕조 쇠망사 2 - 조선을 건국한 세력은 누구인가?를 참조하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그래서 이 당시부터 강남농법을 고려에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가 연합해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운 것입니다. 세종은 강남농법을 조선에 정착시켜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도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실패했을까요?

2) 강남농법의 특징과 정착을 위한 노력

강남농법의 특징과 성패는 어디에 달려있을까요? 첫 번째가 거름을 주는 기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물이 풍족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잘 되어야 강남농법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세종은 책을 지어 농법을 전국에 보급하고자 했습니다.

세종은 '농사직설'의 간행을 통해서 가장 선진적인 농법을 전국에 보급하려고 애썼다. 새로운 시비술(거름 주는 기술)을 소개하고 관개기술을 전파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 1권, 150page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도 어쩌면 농사직설 같은 책들을 백성들이 쉽게 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또한 전국의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막대한 물이 필요했습니다. 그 막대한 물은 모두 한 해 동안 내리는 비로 충당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 얼마큼 비가 오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식물은 일조량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도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알기위해 세종은 두가지를 발명했습니다.

'측우기'와 '해시계'를 개발시키는 것도 강수량과 일조량을 파악하여 논농사에 적합한 환경을 만드는 데 참고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 1권, 15page

 

그리고 강이나 저수지에 있는 물을 논에 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지 아래에서 위로 흐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강이나 저수지는 고도상 맨 아래에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논도 강이나 저수지보다는 고도가 높습니다. 뿐만아니라 고도가 높은 논에도 물을 대야 했기 때문에 그 역할을 하는 수차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임금이 당시 가장 선진적인 관개 기술이었던 수차(水車)를 들여와서 보급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나타낸다. -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 1권, 151page

 

 

3) 세종은 왜 실패했는가

세종이 그토록 노력했지만 실패한 첫 번째 이유는 기후가 다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벼농사에 특화된 기후가 아닙니다. 벼농사는 사실 남쪽에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랍니다. 벼가 잘 자라기에는 한반도는 너무 북쪽에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비 때문입니다. 한반도에도 벼농사를 지울 수 있을 만큼의 비는 내립니다. 그러나 그 비의 대부분이 장마철이라고 부르는 매우 짧은 기간에 내립니다. 따라서 그 기간에 내린 비를 잘 보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강을 통해 바다로 흘러내려가서 막상 모내기할 때는 물이 부족해집니다.

 

세 번째 이유는 토질이 다릅니다. 한반도의 토질은 이른바 화강암 토질입니다. 그래서 물이 매우 맑고 깨끗하지만 동시에 농사를 짓기에는 매우 척박합니다. 따라서 비료가 없으면 농사짓기가 매우 어려운 토질입니다. 당시에는 비료가 없었기 때문에 인분이나 동물의 배설물 같은 것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따라서 같은 농법을 적용한다고 해도 중국강남지역과 같은 산출량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네 번째는 수차제작 실패입니다. 물은 고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절대로 반대로 흐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강이나 저수지에서 논으로 물을 옮길 때나 고도가 높은 논으로 물을 옮기기 위해서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차입니다. 그림을 보면 상당히 단순해 보이는데 왜 제작을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수차제작에 실패하여 결국 세종의 강남농법 정착 작업은 최종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