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조선왕조 쇠망사 5-1 - 중화사대의 역사 : 이성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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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쇠망사 5-1 - 중화사대의 역사 : 이성계 편

by 개인주의자 2024. 11. 13.

이번 포스팅에서는 조선왕조가 왜 그렇게 중화사대를 했는지 그 역사를 근거와 함께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실 조공-책봉은 조선왕조가 들어서기 훨씬 이전이었던 삼국시대때도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이전에 한반도에 있었던 여러국가와 조선이 차별화 되는 것은 조선은 조공-책봉으로 대표되는 중화사대사상을 마음속으로 체화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의 지배층이 했던 중화사대는 외교적인 것이라든지 전략에 의한 것이 아니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했기때문에 행한 것 입니다.

 

 

이성계의 사대주의 행동

1) 조선식 중화사대의 시작은 고려때 부터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은 국가로서 유교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중화사대주의와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중국대륙에 있었던 요와 북송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통해 실리를 챙겼고 금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금과 남송사이에서 실리외교를 취했던 나라였습니다.

 

고려는 군사적으로도 매우 강한 국가였고 독자연호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고려에 몽골이 침입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몽골군이 침략한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렇다 할 저항한번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데 반해 고려는 30년 동안 저항했지만 결국 몽골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그래도 다행으로 몽골은 고려왕조를 아얘 없애버리지 않고 원 황제의 부마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역사상 처음으로 중국대륙에 있는 나라에게 여러 간섭을 받았고 역시 이때부터 고려왕의 시호에 충(忠)이 붙었으며 왕으로 격하되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경험과 함께 신진사대부들이 주자성리학을 들여와 공부를 하며 중화사대주의를 체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한번 중국대륙의 국가에 의해 여러 간섭과 왕의 격하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크게 거부감이 없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2) 새로운 나라의 국명 짓기

이성계가 고려말에 출현한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고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고려왕조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습니다. 그 왕조의 이름은 모두가 아는 '조선'이었습니다. 조선이라는 국명을 짓는데 있어 명나라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성계는 왕조 교체를 이룬 후에도 국호를 고려로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고려왕조를 계승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성계가 국호를 고친 것은 고려국왕으로 등극한 사실을 알리러 간 사신을 통해 명나라 황제가 국호를 고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이성계는 11월 29일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개의 국호를 선정하여 명나라로 보내 다음 해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다는 통지를 받았으며, 이때부터 고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조선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김진년,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비판하다, 40page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드실것입니다. 왜 이성계는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과 화령이라는 선택지를 줬을까요? 조선은 바로 기자조선이라고 기자라는 사람이 중국대륙에서 수천명을 데리고와 문명을 전수해 줬다는 것에 이유가 있었고 화령이라는 이름은 이성계가 태어난 지역명이라고 합니다.

 

이성계는 명 황제에게 새로운 국호에 대한 선택지를 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를 세우는 것은 소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과 화령의 칭호로써 천총에 주달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황대일, 중국 갑질 2천년, 274page

 

참고로 북한의 정식국명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라는 국호는 자신이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라 소련의 스탈린이 지어준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3) 이성계, 죽을 때 까지 청룡포만 입다

여러분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사극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대부분 왕실위주의 사극이기 때문에 조선의 왕들이 어떤 색의 옷을 입었는지 아실 것입니다. 바로 붉은 색인 홍룡포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파란색인 청룡포는 누가 입었을까요? 아직 책봉받지 못한 세자가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성계는 당연히 홍룡포를 입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왕임에도 불구하고 청룡포를 입었을까요? 그것은 명나라에서 이성계를 왕으로 인정하고 책봉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명나라가 책봉하든 말든 왕으로서 홍룡포를 입으면 그만인데 그는 죽을 때까지 청룡포만 입었습니다. 중화사대주의에 대한 충성도 이런 충성이 없습니다.

 

청룡포를 입고있는 이성계

 

이성계가 이렇게까지 명나라에 사대한 근거

이쯤되면 여러분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중간에 어떤 이유로 중화사대주의에 절어버린 것이 아니라 건국당시부터 그랬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계가 한 것을 보면 중화사대주의를 외교라는 명분으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체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했던 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1) 주자성리학적 명분

제가 '조선왕조 쇠망사 4 - 주자성리학'에서 설명했듯이 주자는 유학이론에 여러 형이상학적 개념을 합쳤습니다. 그래서 유학에서 말하는 인의예지를 실천해야 하는 명분을 우주적인 것으로 부여하면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주자성리학에 깊이 빠지면 자연스럽게 이셩계를 비롯한 조선 지배층의 행동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 유학에서의 근거

그렇다면 유학에서 중화사대에 대한 근거가 어디있을까요?

 

옛날에 주공이 명당의 자리에서 제후들을 조회하셨다. 천자께서 도끼 모양의 병풍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서고, 3공은 가운데 계단 앞에 서서 몸을 북쪽을 향하되 동쪽을 상좌로 하였다. 제후들은 동쪽계단에 서서 몸은 서쪽을 향하며 상좌로 하였다. 구이(九夷)는 동문 밖에 서되 몸은 서쪽을 향하되 북쪽을 상좌로 하였다. 팔만(八蠻)은 남문 밖에 서되 몸은 북쪽을 향하며 동쪽을 상좌하였다. 이처럼 변방의 나라들이 다 천지를 향해 아뢰었다. 이것이 주공이 세운 명당의 제도였다. 명당이란 제후의 존비를 밝히는 것이다. -  김영환, 중화주의로서의 유학, 12page

 

이 인용문을 해설하자면 공자가 살던 시대가 바로 춘추전국시대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가 지방의 제후들로 인해 분열되면서 발생한 시대였습니다. 공자는 자신이 살던시대의 혼란을 없애기 위해 사방의 제후들은 천자(주나라 황실)에 예를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중국내부에서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중국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제후국이 아닌 이민족 국가들로 확대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대의 예를 지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고전적 개념에 따르면 사대의 예는 매우 자랑스러운 것으로서 야만스럽지 않다는 증거가 되었다. 조선조 때 사대는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예조의 소관이었다. 주자학에 빠질수록 중국의 동쪽 울타리(동이) , 예의지국이란 자리에 만족하게 되었다. - 김영환, 중화주의로서의 유학, 13page

 

그러니까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사대의 예를 잘한다는 말이므로 그렇게 자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