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문맹이라는 단어를 듣기가 매우 힘듭니다. 문맹인 사람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습니다. 그러나 단 100년 전, 아니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년만 해도 문맹률이 전 국민의 70~80% 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일제시대 이전 조선시대로 가면 아마 문맹률이 더 높았을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우리는 한가지 가스라이팅을 당해왔습니다. 바로 "한자를 썼을 때는 어려웠기 때문에 문맹률이 높았고 지금은 쉬운 한글을 쓰니 문맹률이 낮은 것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이 내용에 동의하십니까?
한자를 썼기 때문에 문맹률이 높았던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인들은 '한자'라는 문자를 절대 쓸 수 없을 매우 어려운 문자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학창시절때 매일 깜지를 쓰며 어렵게 공부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상황에서 한글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문맹률이 높았던 이유를 '단순히 한자를 사용해서'라고 알고있고 그 명제에 아무생각없이 동의하는 것도 바로 학창시절 때 기억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문맹률이 높았던 이유가 단순히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논리라면 현재도 한자를 쓰고있는 일본과 중국은 문맹률이 상당히 높아아 정상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위키백과에 각국의 문해율이 나와있습니다. 문해율이란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입니다. 기본적으로 문맹률이 높다면 문해율이 높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은 위키백과에 나온 한국, 일본, 중국의 문해율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문해율이 같습니다. 중국은 좀 떨어지는데 아마 내륙에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도 도시에 사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문맹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문해율을 보면 단순히 한자를 사용해서 문맹률이 높았다는 것은 전혀 맞지않는 논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한자를 쓰지 못할까요? 바로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상형문자입니다. 따라서 그림이 문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글자 한글자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규칙에 따라 형성된 것입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이 원리를 이해시키면서 교육시키는데 반해 우리는 무조건 외우라는 식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때는 한자부터 일부가 독점했다
조선시대때 시대마다 신분비율이 바뀌기는 하지만 제대로된 교육은 매우 소수만 받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교육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먼저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대부분, 노비 신분 전부, 평민신분 전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약 10%정도에 달했던 양반들과 또 5~10%에 달하는 중인들만이 한자를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자 자체도 독점했지만 고급지식 또한 독점했습니다. 고급지식이 쓰여있는 책은 전부 한자로 되어있었고 당시 평민이 쓰던 언문(한글의 다른명칭)으로 절대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평민들이 보던 언문으로 되어있는 책은 지금으로 따지면 대부분 무협지, 판타지, 야설 같은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책들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금속활자를 가지고 무엇을 했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 '직지심체요절'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이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통해 인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기술을 가지고 고작 했다는 것이 완전한 불경 한권을 출판한 것도 아니고 각 불경에서 뽑아낸 요절이 있는 얇은 책 한권만 인쇄했다는게 말이됩니까?
금속활자 뿐 아니라 조선이 사장시킨 기술을 보고 싶다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겨우 직지심체요절?을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유럽과 일본, 인쇄술로 지식혁명을 일으키다
유럽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라는 사람이 1450년 경 인쇄기를 개발했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 인쇄기보다 78년이나 더 빨리 만들어 진 것이라서 우리의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정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빨리 개발해서 그것으로 무엇을 했느냐 입니다.
서양의 경우 종교개혁자들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한 성경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유럽전역에 보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쓴 여러 기독교 서적도 대량으로 인쇄하여 보급하므로서 유럽일대에 지식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에도시대때 서양의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네덜란드를 통해 수입했습니다. 이 인쇄기로 지식혁명을 이르켰고 오사카, 도쿄같은 대도시에 서점이 수백개씩 생겼습니다. 이를통해 일본사람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사 볼 수 있었습니다.
강명관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 따르면, 1620년대 교토에는 서점·출판사가 14개였다. 1710년께 에도(현 도쿄)와 오사카로 파급된 서점은 두곳에서만 359개나 됐다. 에도 시대에는 서점이 전국에 1140개 있었다. 이중에서 제법 규모가 큰 서점은 책을 저자로부터 직접 사들여 작은 서점에 배포하는 ‘도매상 역할’을 자처했다.
더 스쿠프, K-웹툰, ‘만화 원조’ 일본을 흔들다
일본과 유럽이 인쇄기를 가지고 지식혁명을 일으켰을 때 조선은 어땠을까요?
조선의 국가통제
조선은 책을 만들때 절대 없어서는 안될 활자를 정부가 독점하고 통제했습니다. 그렇다보니 금속활자를 그렇게 빨리 개발해놓고도 서양과 일본에서 있었던 지식의 대량보급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조선정부는 활자를 독점했을까요?
금속활자를 국가가 소유했다는 것은 바로 국가가 지식의 공급처이고 지식의 유통주체라는 의미였다. 금속활자로 어던 책을 찍을 것인가는 오로지 왕과 관료들이 결정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체제 유지를 위한 책만 찍어냈다. 국가가 독점한 금속활자와 금속활자인쇄술은 오로지 극소수의 지배자-양반을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
- 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123page
그렇다면 조선정부는 체제유지를 위해 인쇄해서 백성들에게 보급한 책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로 삼강행실도입니다. 이책이 왜 통치에 큰 도움을 줬을까요? 그것은 삼강행실도가 무엇인지 알면 수긍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434년 직제학 설순 등이 왕명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부자·부부의 삼강에 모범이 될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편찬한 언행록. 교훈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삼강행실도
즉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마땅한 행실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처음에는 한자로 되어 있어 백성들이 읽을 수 없자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언문)으로 번역하여 보급했습니다. 이 삼강행실도는 특히 중종때에 더 많이 보급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조선은 연산조를 거치며 이미 내부적 모순을 드러냈다. 중앙의 관료집단은 귀족이 되었고 그들은 백성이 생산한 것으로 향락을 누렸다. 이런 이유로 백성들 역시 체제에 쉽게 순응하지 않았다.
중략
사림은 체제이 위기 국면을 '삼강행실도'로 돌파하고자 한 것 이었다. - 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147page
정조의 금서지정
조선왕조 500년 내내 특정 도서를 금서로 지정하는 일은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특별히 정조때의 일을 말씀드리는 것은 정조가 현대에 와서 조선의 개혁군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조는 어떤 책들을 금서로 지정했었을까요?
정조대에는 16~17세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서양의 과학 및 종교 관련 서적 중에 조선 홍문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책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 위키백과, 금서
정조가 금지시킨 종교문서는 천주교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책까지도 금서로 지정했다는 것을보면 정조가 진짜 개혁군주가 맞는가 다시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결국 정조도 '사농공상', '무본억말' 사상에 쩌들어 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조선은 500년 내내 활자를 국가가 독점했기 때문에 지식혁명이 일어날 수 없었고 결국 백성들은 너무나 무식해졌습니다. 당시 문맹률이 높았던 것은 단순히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한자를 전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이렇게 금속활자를 세계최초로 개발해 놓고도 한 것이 없으니 주구장창 내세우는 것이 겨우 '직지심체요절' 하나 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