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com, pub-5408680833476551, DIRECT, f08c47fec0942fa0 인물비교 - 백선엽 VS 홍범도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인물비교 - 백선엽 VS 홍범도

by 개인주의자 2024. 2. 2.

저번 문재인정부 때 백선엽과 홍범도 이 두 사람만큼 논란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공교롭게도 문재인정부 한창때 돌아가셨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살하고 나서 좌파들이 서울시청 광장에서 추모한다고 할 때 백선엽장군에 대한 분향소가 광화문에 차려졌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경우 문재인정부가 비행기까지 동원해 유해를 모셔왔고 모셔온 그 곳에서 성대한 예식을 치르면서 많은 화제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 두 사람을 비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독립운동사를 얼마나 잘못 배우고 친일파 논쟁 자체가 얼마나 단편적인 것인지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좌 백선엽, 우 홍범도

 

 

홍범도, 그는 누구인가?

1868년 8월 27일에 출생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고 부하 박영신에게 함북 경원의 수비대를 급습하게 했고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하여 국내에 잡입시 켜 갑산, 혜산, 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큰 전과를 거둡니다.

 

 

 

또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해 오자 700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일본군을 이겼고 청산리 대첩 때 제1 연대장으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부터입니다. 청산리와 봉오동에서 독립군에게 패한 일본군은 간도대참변(경신대참변)을 일으켜 더 이상 간도에 사는 동포들이 독립군에 보급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자 독립군의 재정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독립군의 무장상태와 규모를 알고 싶다면 이승만은 왜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반대했는가? 를 보시길 바랍니다. (빨간글씨 클릭)

 

홍범도와 소련공산당의 관계

동시에 이때쯤 소련은 공산주의를 전 세계에 수출한다는 기치하에 코민테른으로 만주와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접근하여 부족한 자금을 대주겠다고 합니다. 이때 상당수가 공산주의로 넘어갑니다. 따라서 당시 우리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많은 분열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이 거의 몰살되는 자유시참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르쿠츠파 공산당의 편에 서서 상하이파 공산주의자들과 간도 독립군의 무장을 해체시키는 자유시참변을 관망합니다. 1922년에는 국제공산당(코민테른) 국제대회에 국제공산당이 지휘한 극동의 식민지, 반식민지 혁명가로 참석했고 이때 레닌을 직접 면담한 홍범도는 레닌에게 권총과 상금 100만 루블 그리고 적군 모자를 선물 받습니다. 1927년에는 아얘 대놓고 볼셰비키 당에 입당합니다.

 

레닌에게 받은 권총의 권총집

 

 

사할린 부대 출신 김창수와 김오남에게 자유시 참변 당시 가만히 있었다는 이유로 한 대 맞아 이 두 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나서 레닌에게 받은 총으로 이 둘을 사살합니다. 

 

백선엽, 그는 누구인가?

1920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한 그는 1936년 만주국 성립 이후 조선인들에게도 출세의 길이 열리자 만주로 가서 일본의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43년 2월 ~ 1945년 8월까지 만주국 간도특설대 소위로 근무했습니다. 이때 독립군 또는 광복군을 상대로 싸웠다는 헛소리가 있지만 독립군은 자유시참변으로 거의 소멸해서 없어졌고 광복군은 만주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간도특설대가 상대했던 부대는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중국공산당 앞잡이 부대와 마적단 같은 부류들이었습니다.

 

 

 

해방되어 건국된 대한민국을 구해내다

여러분은 6.25 때 있었던 다부동전투를 아십니까? 이 전투가 한국전쟁 3년 동안 있었던 수많은 전투 중 하나가 아닙니다. 다부동이라는 곳은 현재 대구 팔공산일대로 우리가 전쟁초반 낙동강전선까지 밀렸을 때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는 북한군과 한국군이 총력으로 맞붙은 전투로서 북한입장에서는 낙동강 전선만 뚫으면 부산까지 점령하여 염원하던 통일을 이루는 것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나라가 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때 북한군도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에서 활약하던 간부들까지 모두 투입시켜 한국군과 일전을 펼쳤으며 여기서 백선엽장군은 북한군 간부들을 몰살시켜 북한군이 와해되고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시간을 번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졌다면 현재 대한민국은 없는 것이기에 저는 감히 이순신 장군 급에 공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백선엽장군이 일본군 소위가 아니었다면 장군에 올라 지휘할 수 없었을 것이며 간도특설대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 전투에서 북한군 간부들을 몰살시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다부동전투

 

 

친일파를 규정하는 것은 단편적이지 않다

홍범도 장군은 처음에 독립군을 양성하고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에서의 공이 인정되지만 이후 공산당 행적과 자유시 참변에서 독립군이 학살당하는데 방관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이분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백선엽 장군은 개인의 출세를 위해 일본군 장교가 되었지만 해방 후 건국된 대한민국에서 군인으로서 헌신하며 한국전쟁 때 나라가 망할 뻔한 상황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이겼습니다. 저는 일본군 장교를 했다는 것 때문에 이분이 세운 나라를 구한 공이 묻힌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