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아시다시피 약 500년간 이 땅에 존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가 바로 중화사대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전 포스팅, 이성계의 중화사대 역사에 이어 이성계 이후 중화사대 역사를 다루고자 합니다.

공자가 말한 사대의 예란 무엇인가?
조선왕조와 그 지배층이 중화사대사상을 마음속 깊이 체화했다는 것도 매우 치욕적이긴 하지만 더 치욕적인 것은 공자가 말한 중화사대의 예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말일까요? 더 굽혀야 했다는 말일까요?
먼저 유학사상에 있는 사대주의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齊宣王問曰:交鄰國,有道乎 제선왕이 묻기를, "이웃나라와 사귀는 데 길이 있는가?
孟子對曰:有。惟仁者為能以大事小。是故,湯事葛,文王事昆夷。惟智者為能以小事大。故大王事獯鬻,句踐事吳。以大事小者,樂天者也。以小事大者,畏天者也。樂天者保天下,畏天者保其國。《詩》云:『畏天之威,于時保之。』
맹자가 답하기를: "있습니다. 오로지 어진 이만이 대국으로서 소국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탕은 갈나라를 섬기고, 문왕이 곤이를 섬겼던 것입니다. 슬기로운 이만이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태왕은 훈육을 섬기고, 구천이 오나라를 섬긴 것입니다. 대국으로서 소국을 섬기는 자는, 하늘을 즐기는 자요,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자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니, 하늘을 즐기는 자는 천하를 보존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는 자신의 나라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시경에서 가로되, '하늘을 두려워하여, 이로서 자국을 지키는도다'라 하였습니다."
나무위키, 사대 - <맹자>의 양혜왕하(梁惠王下)
바로 위의 인용문처럼 대국도 인(仁)으로서 소국을 섬기고 소국도 슬기롭게 대국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쌍방이 함께 서로를 존중하고 섬기라는 말이 됩니다. 역시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상을 담고 있는 듯합니다.
앞으로 보시겠지만 조선시대에 중국대륙에는 명나라와 청나라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조선에게 했던 행위는 매우 가혹하기 이를 때 없었습니다. 조선이 진정으로 사대의 예를 한다면 위의 인용문에 나온 대로 명과 청나라에게도 어짐으로서 소국을 섬겨달라고 요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보같이 조선은 자신만 사대하면서 500년 내내 당해왔던 것입니다.
조선이 500년 동안 명 · 청에게 해왔던 사대
1) 사람을 바치다
조선은 500여 년 동안 명나라와 청나라에 사대하면서 많은 백성들을 바쳤습니다. 중국 사신이 한양에 오면 각종 행패를 부리며 엄청난 재물을 뜯어감과 동시에 사람을 바치라고 강요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백성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요?
인간이하의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남성의 경우 노예가 되어 죽어라 노동만 하다 죽었으며 여성의 경우에는 성노리개로 전락하기도 했고 역시 노예가 되어 노동만 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성교제나 결혼은 금지였습니다.
공녀조공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은 분들은 한중관계의 역사 1 - 공녀 조공을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조선이 사람을 바쳐온 역사 중에 하이라이트는 바로 '환향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쓰는 욕 중에 화냥년, 호래자식 등의 욕이 있는데 이게 바로 이 당시에 생겨난 욕이었습니다. 저는 환향녀에 대한 역사를 알고 매우 마음이 아팠습니다.
환향녀와 호래자식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은 분들은 한중관계의 역사 3 - 환향녀, 화냥년, 호로자식, 호로새끼를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2) 중국 사신대접
국제관계에서 사신은 필요에 따라 보낼 수도, 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정의 중국사신대접은 한마디로 말하면 한 나라가 탈탈 털리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중국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이용하는 루트가 있습니다. 바로 육상루트로서 지도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사신들은 수도인 북경을 출발하여 신의주 근처에서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평안북도, 평안남도, 황해도를 거쳐 한양까지 왔습니다. 문제는 당시에는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여러 날 동안 사람이 걷는 속도로 가마를 타고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사신이 숙박을 했던 것입니다.
사신이 머무는 곳에서는 항상 성대한 대접이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흉년이 들어 그 지방 백성들이 아사하는 동안에도 중국사신에 대한 극진한 대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중국사신대접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으신 분은 한중관계의 역사 2 - 중국 사신 대접을 참조해 주시고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3) 재조지은, 만동묘, 대보단, 관왕묘
1592년 길고 길었던 일본의 전국시대가 끝을 향해 가면서 당시 일본의 관백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만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이후 7년 동안 전쟁이 이어졌으며 조선의 피해는 거의 망국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동안 명나라에서 군대를 보내 조선을 도왔습니다.
사실 임진왜란 동안 명나라가 조선에 한 짓에 대해서 할 말이 많습니다만 여기서는 그것을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기회가 되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하여간 조선은 명나라에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도리로서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6.25 때 우리를 도와준 미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에 감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우선순위가 있고 그 정도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감사함과 마음으로 체화한 사대주의가 합쳐져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음에도 전략적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고마움이 너무 지나쳐 재조지은(再造之恩 -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을 외치면서 나라의 모든 정신을 무장하는 것도 매우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만동묘, 대보단, 관왕묘였던 것입니다.
- 인조반정
광해군은 명 · 청 교체기에 전략적인 판단에 따라 재조지은보다는 나라의 실리를 택했던 왕이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습니다.
- 만동묘
충북 괴산 화양동 계곡에 지어진 사당으로 조선에 파병한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만동묘를 만든 사람은 주자성리학의 대가 우암 송시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을까요?
숙종은 1687년 2월 "임진년에 신종황제가 군사를 보내 조선을 재조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이 명나라 정권의 존망조차 알지 못하니 개탄스럽다고 한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송시열은 이튿날 상소를 올려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모두 신종이 베푼 은혜의 결과다. 신종에 대한 배신 때문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선조와 인조를 본받아 만절필동의 의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황대일, 중국갑질 2천 년, 280page
선조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올라오자 궁궐을 버리고 도주하여 신의주에 당도하자 조선은 어떻게 되든 말든 "어버이의 나라에 가서 살겠다"라고 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송시열의 열망에 따라 만동묘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 대보단
대보단은 조선왕실이 만든 것입니다. 이유는 어디까지나 왕권강화였지만 재조지은과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조선에서 어떤 위치였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만동묘는 시간이 갈수록 그 위세가 대단해졌습니다.
만동묘는 임금의 지원에 힘입어 나중에는 일종의 성지로 여겨져 온갖 폐단을 드러냈다.
중략
당시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정승, 삼정승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로 위세는 대단했다. - 황대일, 중국갑질 2천 년, 282~283page
이 위세 있는 만동묘를 중심으로 유생들이 세력을 형성하여 조정을 위협하자 흥선대원군은 대보단을 설치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1865년 만동묘의 지방과 편액을 서울의 대보단으로 옮겨 황제 제사를 일원화했다. 그 결과 만동묘는 철폐됐다. 하지만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유림의 상소로 만동묘는 복원된다.
황대일, 중국갑질 2천 년, 283page
- 관왕묘
관왕묘는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관우를 모시는 사당입니다. 관왕묘와 사대주의가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요? 먼저 관왕묘가 조선에 지어진 이유부타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에 관우 사당이 처음 세워진 것은 임진왜란 무렵이다. 1599년 울산성을 점령한 왜군과 싸우다 총탄에 맞은 명나라 장수 유격과 진인을 서울로 옮겨 치료할 때, 명 장수들과 조선 조정이 함께 은을 출연해서 숭례문 밖 산기슭에 세운 남묘가 최초다. 남묘가 완성되자 문무백관이 참배한 것을 계기로 제사가 정례화되었다.
황대일, 중국갑질 2천 년, 286~287page
그렇다면 관우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였길래 조선에 까지 사당이 들어선 것일까요?
중국에서도 관우는 군신으로 추앙받았고, 송나라 말기부터는 신선으로 격상되며 대제로 떠 받으려 졌다.
황대일, 중국갑질 2천 년, 286
아마 관우에게 제사 지내며 승리를 기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추측은 동묘건설의 역사에서 뒷받침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과 행주산성 등에서 장수와 군사들에게 관우 신령이 나타나 대승을 거뒀다는 보고를 듣고 사당 건립을 지시한 것이다. - 황대일, 중국갑질 2천 년, 287page
문제는 임진왜란 이후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왕실과 수뇌부는 그전까지 미개한 오랑캐로만 여겼던 만주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우면서 그들을 천자로 떠받들어야 함을 수모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던 그들은 급기야 정신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 정신승리 중 하나가 바로 관왕묘를 전국적으로 건설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만주족의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를 기리는 조선 사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관우 사당은 전국에 세워졌다.
중략
매년 관우 생일인 음력 5월 13일에 제사를 지냈다. 국가차원의 관우 신격화 작업은 민간에도 큰 영향을 미쳐 무속신앙과 결부됐다. - 황대일, 중국갑질 2천 년, 287page
